TURNING : 제3화 심장 뚫기엔 짧은 화살

by 청사

하늘에는 정체를 모르는 미세한 부유물들이 가득했다. 파란 물감으로 물든 넓은 대지에서 형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사연들이 뿌연 안개처럼 눈 속으로 흡입됐다. 검고 무거워 버티지 못하고 촉박하게 내려앉을 것 같은 먹구름도 있었고, 잔잔한 바람에도 흔들려 떠내려가는 매우 나약하고 격이 없는 새털구름도 있었고, 중력을 잃고 부드럽게 안아줄 것만 같은 뭉게구름도 있었다. 그러나 맑은 하늘에 있는 구름들이 서로 동질성을 갖고 있으나 허구가 아니라 실체로서 고유의 기능을 발휘할 것이라는 언설은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언제든 희망이나 절망으로 전이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먹구름이라 하더라도 매몰차게 굴지 않을 것이라는, 뭉게구름이라 언제나 받아줄 것이라는, 새털구름이라도 잠시 머물러 위로할 것이라는 포근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가끔 칼바람에 휘둘려 몸과 마음을 찌를지도 모른다는, 작은 소망을 싹 쓸어 갈 수 있는 무자비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경고를 날리듯이 거리를 두고 있었다. 본부장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땅과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하늘 사이에서 불규칙하게 다가오는 평화로 펴지거나 혼돈으로 구겨지는 자신의 얼굴을 그림자로 감추고 있었다.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 자동차를 타고 공항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눈앞에 펼친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 있는 자화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나 땅 위에 군림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하늘과 멀리 있는 하늘은 고집스럽게 변화의 가능성을 머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변질을 버리고 진정을 숙명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는 본부장은, 하늘보다 더 변화무쌍한 삶에서 무엇을 취해야 할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밀당을 했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이곳을 통과하면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뿐이다. 차창으로 준마처럼 내달리는 속도감은 빨리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담은 숨 가쁜 마음의 추파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달려가는 속도감과 추파 간의 차이는 마치 주파수의 진동 차이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화음을 가진 심장의 고동처럼 부드럽고 알차게 화합했다. 그 광경을 응시하면서 붙박이 거주민이 된 소나무는 빠르게 지나가는 외부인의 속 타는 마음을 위로라도 하듯이 뒤로 물러서며 무소음 박자로 겸허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동시에 앞으로 벌어질 일과는 관련성이 없다는 듯이 냉정하고 더욱 세차게 달아났다.

대부분 가는 길은 오는 길이 되고, 오는 길은 가는 길이 된다. 오늘 공항으로 돌진하는 길도 가는 길과 오는 길이 하나라는데 의심이 없었다. 더욱이 좋은 일로 가는 길이기에 오는 길도 좋을 것이라는 믿음은 사계가 순차적으로 돌아간다는 자연법칙처럼 의심할 여지가 없는, 틀림이 없는 명백한 예측이고 기대였다. 그리고 이번 여정은 오르기 좋은 길을 따라 정상에 올라 다시 정상에서 내리기 좋은 길을 이용할 수 있는 아주 간단명료한 길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내심 기뻐했다. 이보다 덜 부담이 가는 길은 없을 것이고, 이보다는 굴곡 없이 직선으로 난 길이 없으며, 이보다 무게 잃은 짐을 지고 갈 수는 없다는 확신도 있었다. 그러나 친구의 절실한 부탁으로 보증을 서주고 까맣게 잊어버린 어느 날 냅다 빨간 빚보증 청구서가 날아드는 것처럼, 아프면 크게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계약한 보험이 이해하기 어려운 미세한 요건 차이로 지급거부의 통지를 받는 것처럼, 믿었던 것이 크게 어긋나 둔갑하는 세상에는 울퉁불퉁한 길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완전하게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예지가 확신에 찬 예측을 먹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길함은 편한 길 위에서도 해소되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하자 휴식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라는 공간이 생기면서 마음은 약간 들떴다. 마치 정신적 압박감은 자유롭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무중력상태의 신체가 된 듯했다. 대학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진통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쪼개져 푸시시 사라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상황과 가야 할 상황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향락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천국으로 직행하는 연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던 마음은 남아 있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과 딱 맞는 이어동의였다. 그것만으로도 여정은 매우 유리했고 유쾌했다. 불편한 요소가 하나라도 개입되어 흔들거나, 도중에 방해할 수 있는 요소가 자연스럽게 배제된 자유로운 시간이었고, 마구잡이로 새색시의 아름다움에 취하듯이, 걱정 없는 긴장감으로 초야를 유영하고 싶은 설렘의 향이 퍼지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공항은 그렇게 몇 겹으로 둘러싼 올가미를 내던지고, 층층이 쌓이게 될 유희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카트에 슈트케이스를 실은 본부장은 보딩 수속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바쁜 일도 아니고 급한 일도 아니었기에 주위에 있는 눈 끌림에 충분하게 반응하고 유혹되어도 되는 구멍 난 구속과 망설임의 도덕성을 잃은 자유인이 되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볼거리요, 다가오는 것은 품을 거리였다. 그냥 여행에 필요한 것을 슈트케이스에 담듯이 알짱거리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마음의 가방 속에 용량 껏 담으면 되었다. 무게도 없고 책임도 없는 나만이 즐길 거리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정총장은 공항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희희낙락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약자로 미리 신청을 해놓았기에 이동시간에 맞춰 공항관계자가 나와 마중을 했다. 그렇게 하면 출국절차도 간소화되고 바로 일사철리로 출국장 절차를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총장은 그것이 나이가 든 사람에 대한 예우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호위를 받는 상황을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공항관계자, 본부장, 반비서 등으로 둘러싸여 움직이는 정총장은 의전이 진행되면서 거물급인물처럼 보인다고 여겼고, 그것을 과감하게 즐겼다. 타인의 눈 쏠림은 부담이 아니라 일종의 자부심이었고, 자기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환상의 드라마이며, 화양연화와 같은 향락이라고 인식했다. 다른 한편으로 본부장은 그런 상황이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휠체어에 앉아 특권을 누리고 있는 듯해서 민망해했다. 꼭 필요한 사람이 받아야 하는 의전을 조건을 만들어 이용하는 것은 교육자로서 지식인으로서 부당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물려올 나이 탓이라고 생각했기에 바둑판의 바둑알이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정총장의 기분을 맞추는 일에 밝은 얼굴과 태도로 보조를 맞췄다. 개별적 임무를 가진 병사가 직접 상대를 저격해서 승패를 가르는 장기판보다는, 집단공격으로 승패를 내는 데 드러나거나 도드라지지 않는 바둑판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중에 반대편에서 정총장을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들이 물려왔다. 본부장은 그들이 학교에 근무하는 직원들이고, 더군다나 현재 근무시간인데도 불구라고 여기에 있는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왔는지는 그리고 누구를 위해 온 지는 눈앞에 펼친 인물화로 알 수 있었다. 공로상을 받으러 가는 총장을 축하하고 배웅하기 위한 거창한 왕림이었다. 그들 중에서는 인사과에서 근무하는 두툼한 체격의 보스형의 직원, 법인에 근무하는 직원, 관리실에 근무하는 직원, 그리고 음악학과에 소속한 정교수도 있었다. 한 가족인 듯 아닌 듯,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하였지만 그들의 관계가 알쏭달쏭하기보다는 칡덩굴 처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 시간에 공항에 나왔다는 사실은 공무가 아니라 사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며, 정총장과 특수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확인이라도 해주듯이 자연스럽게 정총장에게 반갑게 다가와 폴드급 인사를 했다. 오가는 인사에는 일방적인 특혜가 있었다는 의미가 배어 있었다. 문안에서 발아한 소문이 문밖에서 만개하고 있었다.

가장 놀란 사실은 본부장 하고 같은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정교수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세하게 보니 정총장의 코 생김새와 정교수의 생김새가 매우 닮은 것처럼 보였다. 더욱이 가는 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얼굴에서 실룩이며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딸이 아니라는 판단할 수 있는 준거는 없었다. 정총장과 정교수의 관계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상황에서 본부장은 과거 자신이 비판해 온 말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고민을 이야기한 것은 그 고민을 준 사람을 비판하는 소리였고, 더구나 비수로 찌르는 상황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암울함이 작동했다. 정총장으로 인해 생긴 고민 털기는 정총장에 대한 불만의 근거나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지난 과거가 급하게 자가배송으로 소환되고 있다는 인식은 다시 공항의 자유로움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엎어져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본부장은 즉석에서 그 발언을 취소하거나 사죄하는 상황이 더욱 악화시킬 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직감했다. 그 순간 상관이 한 사람 더 생겼다는,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이 더해졌다는 슬픈 사실이 가슴속을 크고 넓게 진하게 헤집었다.

혼자서 살고 있다느니, 결혼했다가 이혼했다느니, 서로 성격차이가 있어 별거 중이라느니 등 그녀의 사생활이 도마에 올라 있었으나 확인된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성이 정 씨이기에 총장과 관련되어 있다는 풍문이 캠퍼스 구석구석에 나 돌아다녔었다. 그녀는 독일에서 소프라노 전공한 후 국내외에서 프리랜서 성악가로 공연 활동을 해오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음악학과 교수로 들어왔다는 소문도 사실로 판명되는 듯했다. 결과적으로 나뭇가지에 걸려 떨어지기 직전의 가을 잎새처럼 간당간당했던 소문이, 사시사철 떨어지지 않는 솔잎이라는 사실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개인 공연을 본 적은 없었으나 가끔 대학행사가 있을 때 축가 등을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유명합창단과 함께 독일의 작곡가 칼 오르프(Carl Orff)의 합창곡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에서 소프라노로 참석하는 선전 포스터를 본 적은 있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음악성과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정통 클래식 음악가라는 것을 부각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해 왔던 것이다.

콜로키움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본부장과 그녀는 가끔 공적으로 만났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작은 선물을 주는 센스도 있었고, 항상 상대방 편에서 이야기나 입장을 들어주는 편안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총장인 아버지가 내보이고 있는 철권 같은 권위와는 거리가 있는 자세를 보여왔다. 그녀가 발휘하고 있는 겸손과 부드러움은 아버지가 갖지 못한 좋은 처세술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딸이라는 차원에서 내세운 겸손이든, 가식이든, 아니면 진심이든 관계없이 그녀의 품위를 지켜주는 요소로 작용해 온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다만 사람에 대한 욕심이 있어 정총장과 상통하고 있는 점이 있었고, 드러나지 않고 조용하게 인간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은 권력자의 딸이라고 인식하기에 충분했다. 신분을 알게 되었기에 앞으로의 처세를 어떻게든 다르게 해야 한다는 기준과 방식이 연상되면서 새롭게 넘을 수 없는 산이 생긴 듯했다.

음악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녀 나름의 패션을 확실하게 연출하였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항상 몸 전체를 덮는 긴 코트형의 옷을 선호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사시사철 코트 종류의 패션을 즐겼다. 그것도 하얀 색깔에 무늬가 없고, 음표가 피아노 건반 위에서 뛰어놀 것 같은, 바람에 가볍게 날릴 것 같은 소재를 좋아했다. 가끔은 투피스를 입고 있을 때면 유난히 드러나는 몸매가 시선을 끌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뒤태를 보이며 걸어간 적이 없었고, 나란히 걷거나 뒤에서 걷는 모습만을 봤다. 아마도 그것이 매력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겸손이라고 여겨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패션을 즐겼다. 어쨌든 숨기고 싶은 것을 패션 감각으로 해결하는 것은 그녀만의 재치였고 미덕이었고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패션으로 신체를 가려 애매하게 했지만, 그녀의 마음에서 나오는 울림으로서 감정이나 태도를 가리지 않았다.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감성적이고, 이성적이며, 사실적이며, 예술적으로 접근했다. 오늘도 그녀는 순수한 요정처럼 하얀 코트를 입은 모습으로 공항에 나왔다.

얼굴이 마주치자 그녀는 “어머.. 교수님”이라고 하며 본부장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가족이라는 사실이 사석에서 밝혀진 것이 복권에 당첨된 행운이나 가슴에 단 훈장이라도 된다는 듯이 목소리와 자세에 자신감이 펄펄 넘쳐흘렀다.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순간이 왔으며, 자신의 신분이 노출된 것을 소프라노 주파수의 대화로 즐기기 시작되었다. 본부장은 그녀의 인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극적 효과를 위해서 모르는 척하며 “아 예, 어떻게 여기까지?”라고 인사를 했다. “네, 이렇게 됐네요.”라고 공개된 본질을 숨기고 말을 이었다. 그녀의 높은 목소리에 맞추다 보니 전신에는 점점 세게라는 음자리표 리듬이 대화의 공기를 점점 데워갔다. 우연히 발을 맞추며 걸어가는 동안 본부장은 고주파의 여운에 휘말려 청각을 곤두세우며 대화보다는 높아진 목소리의 흐름을 따라갔다. 가끔 마주치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오랫동안 피부접촉이 있는 사이처럼 사랑스럽게 전파됐다.

그녀는 “총장님 잘 부탁드려요.”라고 하며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어법을 했지만 ‘총장님’이라는 호칭에는 아버지라는 사적 의미와 총장이라는 공적 의미가 모두 들어있었다.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었고, 그분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자랑질이었다. 더욱 확실한 것은 그것이 아버지와 딸 사이라는 사실에 쐐기 박는 소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돌연 들고 있던 커피를 본부장에게 줬다. 본부장은 얼떨결에 받아 들며 “아니, 감사...”라고 말하는 순간 “제가 좀 먹던 거예요. 입술 자국이 묻었고, 호흡하다 생긴 공기를 살짝 얹었으니 한두 가지 맛이 더해진 셈이죠.”라고 커피로 만들어지는 분위기를 더욱 밀도 있게 노골적이며 재치 있게 고조시켰다. 본부장은 “하하 입술 자국이 있고 숨으로 장식한 커피라. 맛이 어떻지 궁금하네요. 입술자극이 어느 쪽이더라. 어쨌든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예상치 않은 돌발적인 상황에 대처했다.

물끄러미 커피를 들고 마실 것인지 말 것인지를 본부장은 망설이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정교수는 본부장의 처신과 판단을 웃으며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정교수는 “저는 위생 관념이 좋지 않아요. 꺼림칙하면 버리세요.” 그것은 분명히 땅에 떨어진 말처럼 버리지 말라는 강한 메시지였다. 본부장은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여전히 멈추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더욱 초조해졌다. 마시면 비굴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송두리째 입장하는 회원이 되는 상황이 되고, 마시지 않으면 그녀의 언행을 완전히 무시하는 괘씸죄를 짓게 되는 상황으로 몰릴 것 같았다. 집요한 제의는 장난으로 위장한 본의인지, 아니면 본의를 위장한 장난인지 알 수 없는 미로로 빠지고 있었다. 받아 든 커피가 사랑의 고백이나 애정이 있다는 표현이 아님은 분명했다. 아마도 허물이 없는 사이라는 신호였고, 가깝게 지내게 되어 반갑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이 상황에 가장 맞는 아니 자신의 상황에 알맞은 선택이라고 정리했다. 본부장은 “귀한 체취가 담긴 커피라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셔야지요.”라며 눈요기로 맛을 보면서 아찔한 광경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화기애애하기도 하고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속절차를 하기 위해 무더기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문이 열리면서 자신보다 더 먼 관계에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본부장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턴을 누르고 모두 타기를 기다렸다. 대학에서의 지위나 나이가 아니라 인적 사다리 관계에 의해서 위계서열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상전이 많아서 스스로 하인이 된 것이었고, 서비스맨을 자처하는 상황이 되면서 신분의 차이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모두 탑승하고 문이 닫히면서 엘리베이터 안은 경쟁심이나 이해득실이나 서열경쟁이 전혀 없었지만 허공에는 이유 없는 정적이 흘렀다. 그것을 쉽게 깨지 못하는 가운데 숨소리가 커져 순회하면서 오히려 긴장감이 돌았다. 본부장 바로 뒤에는 정교수의 로즈향이 진하게 났다. 사용하는 향수로 후각을 도발해서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했고, 호흡을 조절하는 작은 숨소리로 자신과의 공명을 알렸다. 그리고 아슬아슬함을 즐기듯이 가끔 의식적으로 옷깃을 살짝 닿도록 하는 촉각으로 자신의 거리를 좁혔다.

적막한 분위기에서 정총장은 “왜 나왔서?”라고 첫 성을 울렸다. 누구한테 말하는지 목적을 잃은 말은 순간의 정적을 깨트렸지만, 아무도 그 말에 반응하지 않으면서 정적은 다시 찰떡붙이기라도 하듯이 뭉치며 다시 깊은 정막감이 흘렀다. 그 순간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 본부장의 허리를 손으로 살짝 찔렀다. 우연히 부딪힌 것으로 알고 살짝 움질 하면서도 누구인지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다시 같은 곳을 찌르고 있었다. 첫 번째 찌름은 우연이었고 두 번째는 실수라고 하기에는 의도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매우 짧지만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본부장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열심히 올라가는 층수 표시의 숫자에 긴장감을 쏟아 강제로 밀어 올려 이 상황이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그녀의 의도적인 장난기는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었지만 기분이 상하거나 불쾌감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커피나 찌름은 그녀의 인사였고 친밀감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그런 살가움과 긴장감이 섞여있는 틈에 매몰되고 있는 사이에 정총장이 다시 침묵을 깼다.

“본부장?”

“예”

“괜찮은가?”

“예, 무슨 말씀...”

“일본에 연락을 취하라고 한 것”

“아 예, 담당자와 직접 통화를 해서 해결했습니다.”

다행이구만”

본부장의 혼돈된 마음과 정교수의 도발한 마음을 싣고 엘리베이터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보턴을 누르고 문이 열리면서 아쉬움과 긴장감은 내리는 사람들의 옷깃에 묻어 해방되는 듯했다. 모두 내렸지만 정교수는 여전히 뒤에서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다. 장난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지 모두 내린 공간과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려는 듯이 분명하게 망설임 없이 웃으면서 손을 보였다. 그리고는

“요즘 제 손이 말을 안 들어요?”

“네?”

“자꾸 남의 옆구리로 쪽으로 향하..”

“....”

“오늘 기분이 좋으시군요. 내리세요”

“손만이 아니라 발도 안 듣네요.”

“이번에는 말도 듣지 않는가 보죠. 하하하”

엘리베이터에서 생긴 일은 엘리베이터가 닫히면서 행방이 묘연해진 채 다행스럽게 그대로 갇혀 버렸다. 보딩 절차를 마치고 탑승시간이 되어 출국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희희낙락했고 즐거웠다. 모두에게 둘러싸인 정총장은 주인공으로서 그런 분위기를 충분히 넉넉하게 즐겼다. 덩달아 모두의 발길은 승자의 길을 걷는 것처럼, 천국의 문을 향해 들어가는 들뜬 마음처럼 고조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지옥이나 불길한 분위기가 잠입하기 어려운 그런 좋은 상황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서 움직여야 하는지 등이 정해져 있었기에 함께 활기차게 걸어 가면 되는 그런 길이었다.

“교수님, 잘 부탁드려요.”라고 정교수가 큰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 순간, 본부장의 대화 공간을 빼앗듯이 반비서가 비집고 들어와 “안심해. 잘 모실게.”라고 말했다.

“그래 잘 부탁해. 네가 있으니 더욱 안심이 돼”

“...”

정교수와 반비서는 한집에서 자란 자매처럼 팔짱을 끼고 희희낙락거리며 출국장으로 걸어갔다. 닮은 면도 찾기 어렵고, 배가 다른 자매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 사람의 생김새와 말투와 패션이 서로 달랐다. 본부장은 정교수와 반비서 간에 나눈 대화나 둘의 친밀감에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아마도 아버지인 정총장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정교수와의 관계가 좋은 것이라고 추측하기에는 너무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공적인 관계 이전에 사적인 관계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출국장 입구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며 일정에 돌입했다.

본연의 역할을 다 하듯이 출국장의 입구는 가는 사람과 남는 사람을 냉정하게 갈라놓았다. 정총장은 에스코트를 받으며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심사대를 통해서 유유히 들어갔다. 탐승 게이트로 가기 전에 정총장이 들려야 하는 곳이 있었다. 본부장은 “VIP라운지로 가야지요?”라고 말을 이었다. 라운지에 들르는 것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정총장이 자신의 위치가 타인과 다르다는 인식을 회생하게 하는 또 다른 공항 의전 코스였다. 라운지에는 부를 자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번쩍번쩍한 옷차림으로 먹는 것과 휴식하는 것과 서로 동류라는 눈 마주침을 하는 것을 즐기는 그런 시간이었다. 이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돈이라는 배경과 사회적 지위에 따른 자신감과 즐기고자 하는 들뜬 마음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안내방송을 들으며 탑승게이트 앞으로 왔다. 이젠 시야에서 벗어나 완전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기내 서비스는 승무원에게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탑승이 시작되면서 반비서가 정총장을 부축하는 척하며 동행했다. 정총장은 비즈니스석에 그리고 반비서와 본부장은 일반석에 각각 앉았다. 이런 자석 배치는 불공평하다고 인식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자유를 누리도록 나름대로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신분의 차이를 구분해 줌으로써 잃은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았던 것이다. 자유는 비즈니스석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아 마자 본부장은 정교수와의 관계가 궁금해서 반비서에게 물었다.

“반비서님. 정교수님과 친한가 봐요?”

“네? 음... 그렇다고 봐야죠”

“친구처럼 대화를 하시고... 팔짱도 끼고...”

“하하하 레즈사이... 아니고요. 고교 때부터 친구예요.”

“예? 그렇군요 어쩐지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닌듯했어요.”

“우정인지 증오인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네요”

“.....”

눈을 감고 조용히 본부장은 공항에서의 긴 하루를 뒤집어 봤다. 공항에서 자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정총장과 혈연이거나 사적 인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놀란 하루였다. 그렇다면 교수나 직원의 채용이나 인사, 교내 보직인사도 그런 맥락에서 진행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담긴 의미가 정수리를 찔렀다. 대학 운영에 사적 관계와 사연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것은 곧바로 인사부정이나 직권남용 등과 연결될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혁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과 사적인 인사 조치는 적대적 관계에 있어, 반대파가 공격하기에 좋은 사냥감이 되어, 치명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재료였다. 본부장은 그런 사연들이 아무 일 없이 잘 진행되어 왔기를 바랐고, 심장을 뚫기에 턱없이 짧은 화살이 되기를 바랐다.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정총장은 지위의 장점을 충분하게 최대한 활용해 왔다. 특히 인사를 하는 데 있어 실력보다는 외형적 명예나 인간관계를 우선 중시하였고, 합리적인 인물보다는 절대복종하는 인물을 선호하였다. 그런 경사된 듯한 인사를 숨기지 않고 노골적이며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실행하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와 비전을 실천하는데 큰 문제나 장애물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캄캄이인사라는 점과 회전문인사라는 부정적인 인사가 가끔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임기는 문서형식에 불과해 지켜지지 않아 예측이 불가능했고, 그런 이유로 드러나지 않는 사적 감정이 축적되거나 즉흥적인 반발이 겹겹이 쌓이고 있었지만, 불협화음이 공론화되거나 문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이 고이면 썩을 수 있다는 생각과 차곡차곡 퇴적물이 쌓이며 부패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이 됐다. 권력에 붙어 충성맹세를 하는 부류가 많아졌고, 강제적이며 사유를 알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인물 사이에서 인사 프로세스나 편향성에 대한 불만이 화약 냄새처럼 가끔 짙게 풍기기도 했다. 본부장은 아마도 어딘가에서 불이 지펴질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이 있었지만 표면적으로 부풀어 오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공항에서 역시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요소 중에 가장 큰 것은 정총장의 인사에 대한 순기능과 역기능이 교차하여 파열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그동안 정체불명이며 신원미상이었던 정교수가 총장의 딸이라는 소문이 사실로 판명됐다는 것, 이곳저곳에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직원이 인척이었다는 사실, 총장과 밀착되어 있던 반비서와 정교수가 친구라는 사실, 그리고 사적 모임에 있는 정교수의 입김으로 본부장이 된 것은 아닐까라는 자신인사에 대한 의구심, 사적 관계에 의한 교수채용이나 보직인사의 비밀 등이 맑은 하늘에 떠있는 작은 조각의 구름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교수의 옆구리 도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비서의 “우정인지 증오인지...”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것이 던져준 유무형의 굴곡진 의미를 안고 여정을 시작했다. 본부장에게 공항현장은 유쾌하게 떠나가는 곳이 아니라 비밀이 누설되고, 소문의 진위가 확인되고, 실타래처럼 얽혔던 관계가 폭로되며,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난해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굉음과 함께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비행기 안에서, 바래버린 비밀과 짙어진 검은 그림자를 넓게 빨아들이는 창공 속으로 던저 묽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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