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만남으로 이어져야 맛이 난다. 우연이 살아나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만남은 허술하게 다가오는 다양한 우연의 조각을 찾는 열정이 있어야 성립된다. 예상하지 못하게 다가오는 우연을 살려내고 만남이 이어지는 현상을 인연이라고 한다. 그것이 삶의 본질이다.
자신이 누락된 우연은 없다. 그것은 남의 것이다. 홀로 있는 만남도 없다. 그것은 만남이 아니다. 만남이 없는 인연은 없다. 인연은 상대방이 있어야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맛이다. 우연과 만남과 인연은 자신이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생기는 우연과 만남과 인연을 소중히 해야 하고 생명을 넣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모든 험한 질감을 가진 우연을 잡을 필요는 없다. 억지로 끌어오거나 무리하게 돌진해오는 것은 모르는 척 지나가게 놓아둬야 한다. 지나가도록 묵인을 하거나 놓치는 것이 약이 될 수 있다. 독이 작용하는 만남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독이 있는 만남은 악연을 낳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일본자매대학의 학생들이 대학에서 시행하는 연수에 참가하여 한 달간 한국에 머무르게 되었다. 일본에 유학했다는 이유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여 그들에게 문화체험프로그램을 설명하였다.
설명이 끝나갈 무렵 “견학하고 싶은 곳이 있는가?”라는 지나가는 말로 의견을 들었다. 돌발적인 질문이기에 아무도 답을 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서로 눈치를 보는 가운데 한 학생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떠듬떠듬 “독립기념관!”이라고 또렷이 말을 했다.
속으로 ‘일본 학생이 독립기념관!’이라며 놀랐다. 동시에 ‘과연 일본학생들은 그곳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생각이 나면서 답변이 엉키고 말았다. 한일 간에 얽혀있는 과거사가 궁금해서 견학하고 싶은 것인지, 한국과 일본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이 주장하는 과거사에 대해서 흠집을 내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문화체험을 하러 왔기에 한국에 대해서 알고 이해를 하고 싶은 차원에서라고 자의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시 그 학생의 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숨어있는 의도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귀를 쫑긋하면서 설명을 열심히 듣는 초롱초롱한 눈에서는 순수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 그곳은... 계획에 없어서.”
“꼭 가보고 싶어요.”
“조정할 수 있을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하였기에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멘트를 했다. 그러나 매우 낭랑한 울림으로 다가온 그 학생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조용한 공간을 통해서 학생의 눈빛이 스르르 눈에 안착했다. 이윽고 그 학생이 내 마음에 통으로 꽂히고 말았다.
이미 연수내용이 정해졌기에 임의로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결국 연수기간에 독립기념관에 가는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연수 마지막 날 학교에서 준비한 저녁 파티를 마치고 돌아오는 스쿨버스 안에서 빈자리를 찾던 그 학생이 옆에 앉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을 전하는 순간 그 학생이 발산하는 순수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방문해서 그곳을 가 보고 싶어요.”
“그런 기회가 오길 바랍니다. 그땐 안내를 하겠습니다.”
“전공은?”
“영문학입니다.”
“역사학인 줄 알았지.”
“...”
“희망하는 직업은?”
“스튜어디스...”
“신장이 될까? 아니 농담이에요.”
“그것이 약간 걱정이에요.”
“혹시 면접에서 걸림돌이 되는 듯하면, 키는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마음만은 더 클 수 있다고 말해보렴.”
“아주 좋은 말입니다.”
그녀는 하얀 손가락으로 가방 속에서 울긋불긋한 메모지를 꺼내 ‘그 말’을 재빠르게 적었다. 그리고는 “연락처를 알려달라.”며 받아 적었다. 나는 '그 말'은 장식이고, '연락처'가 본지이기를 바라며 그 광경을 봤다. 이미 내 마음에 꽂힌 그 학생의 노트 속에 나는 그렇게 살아가게 되었다.
새로운 화두가 시작되면서 무르익어 갈 때 캠퍼스에 도착해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였다. 그 학생은 내 속마음을 간파라고 했다는 듯이 가깝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밀착하여 포즈를 취했다. 아주 가볍게 밀착한 옆구리에서 품어내는 온기가 한 장의 사진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사진을 간직하는 날까지 그 느낌과 동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느낌의 온도와 길이를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온기를 잘 보듬고 있는 듯했다. 나는 우연이 발생하는 만남이 이루어져 인연으로 발전하기를 염원하였는지, 그 학생을 ‘memory’라는 글자에 의지해서 ‘M’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