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좋은 현실에 있어야 아름답다. 일본의 지진 상황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어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가 불편했다. M이 휘말리지 않았으면 하는 걱정 때문이다. 안부가 염려되어 그동안 몇 번인가 서신을 보냈지만 연락이 없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주위를 밝히고, 솔직하게 이어가는 화법이 즐겁고,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친다는 생각이 들고, 할 일을 깔끔하게 정돈하는 산뜻함이 있어 가까이하고 싶은 존재였다. 앞으로 더욱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가는데 많은 가능성을 가진 젊은이라고 여겼다.
‘어디론가 사라진’이라는 불안으로 발현된 M의 행방불명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애인을 걱정하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길게 아렸다. 그렇다고 서서히 잘 쌓아 올린 돌탑과 같은 촘촘한 교류나 달달하게 오가는 친밀감도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도 않게 M에 대한 돌출된 기억이 감정을 부추겼다.
나는 다시 편지를 썼다. 존부를 확인하고 싶다는 간절함과 불안감에 써야만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M군 살아있는가?’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하얀 편지지 위에서 글귀가 빙빙 돌며 방향을 잃고 있었고, 이내 썼다가 지우는 허술함에 흠뻑 빠져버렸다. 내용은 매우 간결한 것이었지만 표현하고자 한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
짧은 길을 돌아서 가거나 우회해가면 변명을 해야 한다. 질타를 모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 길은 짧게 가면 변명이 필요 없다. 그것이 좋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강한 질타가 쏟아져도 먼 길로 돌아가는 서신을 보내려 한다. 거기에는 조금이라도 생존의 길이를 넓히고 싶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먼길로 가는 생사의 글귀를 쓰고 말았다.
M君, この手紙が届きましたか。
(M군, 이 편지가 도달됐습니까?)
나는 되도록 부정적인 단어나 표현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마지막 연락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있었고, 불완전한 인식이 잔뜩 포함되어 있었다. 무거운 낙담을 암시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생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균형 잃은 생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후 기울어진 저울추를 잡으려 수시로 이메일이나 포스트를 들여다봤다. 그녀의 생사와 나의 기다림이 동행하고 있었다. 기다림은 희망을 채워줄 수 있기에 좋지만 때로는 희망을 앗아갈 수 있기에 두렵다. 나에게 주어진 기다림은 나의 소유이지만 그녀의 생사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매우 힘겹고 버거웠다.
그 누군가의 힘에 의해 이미 결론이 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기다림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기다림을 포기하면 이 상황은 끝이 나게 되는 것이다. 확인하는 것이 그녀에게나 나에게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놓은 것이 좋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살게 하고 나를 해방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것이 그녀의 존재를 날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생겼다. 살아있는 기억에 묻어두는 것이 그녀를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기억에 갇혀 있는 상황은 뇌경색에 빠져있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기억으로 그녀를 옥죄고 있고 결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통해서 그녀의 생사를 가르고 그녀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안에서 기억과 자유는 그렇게 비정하게 결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억을 털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가닥의 희망이라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기대라고 하더라도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연락이 올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내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이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에 잠겼다. 지진이 없던 상황에 머물지 아니면 지진이 일어난 상황에 멈춰 삶을 이어갈지 결판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분명히 많은 억측과 상상이 자신을 괴롭힐 것이라는 사실만은 알았다.
이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할까?’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한순간이라도 그런 생각이나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연락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살아있지 않다면 연락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아버지와 형과 동생의 생명이 길게 이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란 적이 있었다. 피 끊는 간절한 소망은 아주 간단하게 무시되어 잃었다. 이번에는 먼 인연으로 연결된 사람의 생명이 길게 이어지기를, 그리고 두 번 다시 소망이 무너지지 않기를 절실하게 바랐다.
살아있어 연락이 온다면 만사는 해결될 것이다. 그녀에게 보냈던 걱정이나 편지, 불안함, 행방불명, 생사 등은 모두 희망으로 매듭을 짓는 이른바 해피엔딩이 되기 때문이다. 바람이 실현된다면, ‘memory’의 ‘M’을 기억이 아니라 현실에서 마주할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삶은 고역이다. 유쾌하게 살든지 불쾌하게 살든지 하는 선택이 있을 뿐이다. 인연은 고뇌이다. 소중하게 간직하든지 대충 지워버리든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 나에게 M은 고역이나 고뇌가 아니라 유쾌한 삶과 소중한 인연의 일부이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