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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사랑하는데 필요한 조건

by 청사

새끼손가락 반지는 M군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알 수 없었다. 좋은 의미를 가진 손가락과 반지였기에 부정적인 여파는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다만 주는 것의 의미와 받는 것의 의미, 그리고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M군에게 연락이 왔다.


「선생님께

반지는 잘 받았습니다.

생애 처음 받은 것이어서

어리둥절하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 사진을 동봉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휴가를 얻어

한국을 4일간 방문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되면 뵙고 싶습니다.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한국에서 모처럼 M군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 설레었다. 그동안 눌려있었던 무엇인가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반지의 효험이 있었다는 막연한 예감에 물건은 마음이라는 속물근성을 예찬하고 있었다. 급하게 답변을 했다.


「M군에게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만사 제처 두고 시간을 내겠습니다.

여행일정에 도움이 되다면

안내하겠습니다. 」


한국에 도착하는 당일 나는 꽃을 준비했다. 처음 승무원이 되면서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지만 결국 오지 못하여 전달하지 못했던 꽃다발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계신 그녀의 부모님의 선물로 한국전통의 놋그릇과 수저 세트를 준비했다.

나는 조선호텔 로비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요동이 치는 기분을 맛보는 것도 매우 즐거웠고 짜릿했다. 대학 시절 첫 미팅을 했을 때 상기됐던 시절이 떠올랐고, 마치 오래 만나지 못했던 애인을 기다리는 감정이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며 환한 웃음을 짓는 그녀가 보였다.

발걸음을 앞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녀를 닮은 중년의 여성이 함께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라고 소개를 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이기에 놀라며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00입니다. 매력 있고 능력이 있는 따님을 두셔서 행복하시겠습니다.”라고 얼렁뚱땅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어머니는 매서운 눈으로 한번 스캔을 하더니 별안간 속삭였다.


“우리 세대야! 우리 세대!”


모녀지간의 대화인듯했지만 나는 굳어버렸다. 매우 당황하면서도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나에게는 자신이 젊은 세대가 아니라는 잊었던 사실이 소환되었다. 어머니는 ‘딸이 사귀고 있는 상대방!?’을 점검하러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M군을 봤지만 그녀는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개의치 않고 웃고만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어머니에게 명동 안내를 제안했다지만 다른 일정이 있다고 부드럽게 거절했다. 어머니는 그 이상의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호텔 문을 나서려고 했다. 나는 “따님을 잠시 빌리겠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그녀와 함께 호텔을 빠져나왔다.

걸어가면서도 ‘나를 사귀는 사람으로 소개를 한 모양’이라는 추측에 몰두하고 있었다. “선생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나는 예정한 대로 유명한 장충동 할머니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어머니가 던진 무거운 여운이 여전히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순간 산통이 깨질 것 같아 묻어두기로 했다.

그녀는 어머니와 나의 기분에 관계없이 유쾌한 얼굴과 명쾌한 발길을 딛으며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그녀는 누군가가 기다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차도 가까이에 서있었다. 위험한 것 같아 그녀의 팔을 잡고 살짝 당겼다. 그 순간 그녀는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았다. 거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눌려 어설픈 상황을 이어갔다.

우리는 족발과 맥주를 주문했다. 운전을 해야 했기에 건배만 했다. 그녀는 상추와 족발과 생마늘을 넣은 쌈을 반복적으로 즐겼다. 그것을 안주로 삼아 맥주를 들이켜는 그녀의 얼굴은 만개한 수국과 같았고, 입술은 붉게 타오른 장미와 같았다. 꾸임이 없는 그 모습을 남기기 위해 여러 컷을 찍으면서 그녀가 사라지면 어떻게 하지 라는 푸념을 쌈에 싸 먹어버렸다.

그녀는 이 순간과 시간을 유쾌하게 즐기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녀는 곧바로 호텔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공원에서 해본 적이 없는 데이트를 했다. 그녀는 쌈으로 먹었던 마늘이 마음에 걸렸는지 손으로 입김을 맡으며 확인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가장 밀접하게 마늘 냄새를 맡을 수만 있으면 하는 이상한 기대를 했다.

벤치에 앉자 제법 싸늘한 기운이 몸을 움츠리게 했다.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기다렸다는 듯이 걸치며 자연스럽게 내게로 약간 기대며 내 손을 잡고 주머니 속에 넣었다. 어둠 속이었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빛이 났고 기쁨이 가득했다. 그녀는 잡았던 손에 힘을 주며 얼굴이 마주치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녀의 입술은 차가웠지만 가벼우면서도 간결하게 떨리는 스침으로 다가왔다. 이어서 알지 못하는 자극이 부동자세를 제압하면서 길게 입맞춤이 이루어졌다. 거기에는 맡고 싶었던 마늘 냄새도 없었고, 맥주 냄새도 없었고, 족발냄새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품어내는 거친 숨소리에는 그녀만의 향기가 있었고, 미끈한 부드러움이 있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거리를 두며 선을 넘지 않으려 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에 현기증이 왔다. 자연스러운 이 상황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그녀와 나눈 키스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스럽게 그녀는 질문이나 의미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나는 준비했던 꽃다발과 부모님 선물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골프용품을 선물로 내놓았다. 앞으로 3일은 남았지만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되지 않았다. 다만 한국에서 가볼 만한 여행지를 알려주고 호텔 방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몸을 붙이고 애인 사이처럼 행동했다. 좋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했지만 두 눈이 빚어내는 따듯한 기운이 이 순간을 달구고 있다는 생각에 빠졌다. 엘리베이터가 도착을 하자 “주차장까지 마중을 갈까요?”라고 여운을 남겼다. “혼자 갈 수 있으니 괜찮아.”라고 하지 말아야 할 거절을 하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녀는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 가려고 했다.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눈이 마주치자 내게로 뛰어들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몸을 날렸다. 얼떨결에 그녀를 안고 말았다. 온몸을 온전하게 안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 느낌 그대로가 좋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결론을 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녀와 나 사이를 매듭 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망설였던 사실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그녀는 젊고 나는 나이가 들었다. 그녀의 미래는 창창해 희망이 커지고 있지만, 나의 미래는 짧아 희망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어머니 말대로 나는 어머니 세대라는 사실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중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모든 것은 그녀의 결정대로 따를 것이라는 다짐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말에 꽁꽁 메이고 말았다. 어머니의 말은 그녀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를 둘로 갈라놓았다고 생각했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 새벽에 나는 호텔에서 공항까지 배웅했다. 가는 도중에 어머니와 핵심에서 멀어지는 이야기만 했다. 그녀는 뒤에서 눈을 감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대화의 본질을 숨기고 이야기는 허공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속마음을 말했다.


“저는 나이가 있지만 따님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네에엣.. 설마”


말이 땅에도 떨어지기 전에 차 안에는 빽빽하고 거친 긴장감이 돌았다. 나는 떨리는 감정으로 생기는 호흡의 흔들림을 느끼지 못하도록 아주 차갑고 냉정한 마음으로 대응하려고 했다. 입은 굳어졌고 숨이 차올랐다. 꽤 오랫동안 정적과 침묵이 흘렀다.


“제 마음은 당장 프러포즈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머님 말씀대로 따님과 저는 세대가 다르기에 프러포즈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생에 동일세대로 만나면 반드시 열백번이라도 프러포즈를 하겠습니다.”


그녀도 어머니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차 안에는 사람이 없는 듯이 말소리도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속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억지로 길고 가늘게 숨을 끌어갔다. 꼴깍꼴깍 하는 거친 긴장감과 여운만이 흐르고 있었다. 달려가는 차창으로 가로등 불빛만이 어두워진 나의 마음과, 침묵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하늘을 보는 그녀의 마음을 비추고 있었다.

헝클어진 마음을 떨치기 위해 나는 속도를 냈다. 이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이 있는 곳으로부터 빨리 사라지고 싶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나는 파킹을 한다는 이유로 일행을 내려줬다. 나는 차 안에서 눈물인지 아쉬움인지 시원함인지 흘리지 못했던 뜨거운 물기를 빼 식혔다.

어떻게 배웅을 할까라고 걱정했지만 그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보딩체크가 끝나자 어머니는 “시간이 없으니 빨리 들어가자.”라고 재촉을 했다. 어머니의 다그침과 불안한 내 마음 사이에서도 그녀는 어머니를 뒤에 두고 보란 듯이 내 손을 잡고 보안체크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어머니를 의식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걸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고 행동을 맞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보안체크게이트로 가는 길이 길었다. 나는 그녀의 당당함과 힘찬 호흡에 말리고 말았다. 걸어가면서 부딪치는 마찰음은 마치 사랑이었고, 손길은 그녀의 마음이었고, 거친 호흡은 향기였다. 게이트에 다다르자 어머니가 강하게 당겼다. 그녀는 다시 키스를 하고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게이트에서 사라진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서있었다. 멀리 사라져 가는 그녀를 향해 “don’t go, don’t go don’t go”를 소리 내지 않고 외쳤다. 어머니와 그녀, 그리고 나는 그렇게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걷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 반지가 생산한 신비와 힘은 여기까지인가 라는 생각에 약지 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번갈아 봤다. 선택에는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선택에는 후회가 없었다. 나는 우리의 반지가 어느 손가락에 잘 어울리지를 생각하며 주먹을 쥐고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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