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수분 Feb 03. 2024

이번 배역 맘에 안 드네요!

- 어색한 웃음, 눈 맞춤, 그 진심!

누가 내 인생을 설계했을까?

내가 여기 이러고 있을까. 

그때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그때 선택을 멈췄더라면......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아서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죠.

이미 던져진 삶에서 긴 시간을 흘러와, 잊고 싶은 기억조차 데리고 살아야 하는 부조리한 인생.

마음은 정처 없이 떠돌고 글도 두서없이 주절대는데 누구에게든 하소연을 하고 싶네요.




제가 시집가서(1989) 처음에 시부모와 함께 살았어요.

저는 혼자 집에서 주부의 역할을 했고 가족들은 아침에 나가서 일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이었죠.

시부모님이 가게를 했고 청년 종업원이 둘 있었어요. 가게와 집이 가까워서 시어머니는 걸어 다녔고 남자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남편은 건설회사 직원이라 매일 출퇴근이 아니고 현장에서 불규칙하게 집에 왔어요.

그러니까 저는 가게 안집살림을 하는 '가사도우미' 역할을 했어요. 예전에는 '가정부'라고 했죠.


갓 결혼한 새댁이 신랑도 없는 집에서, 온갖 살림에 가족으로서의 관계설정까지 해내야 하니까 저는 늘 자괴감에 휩싸여 살았어요. 혹자는 너도 그 집 식구가 됐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할 수도 있을 테지요.

근데, 그게 왜 그랬냐면 전혀 원하지 않았던 배역이 저한테 주어져서 그랬던 거 같아요.


저도 나름 커리어를 갖춘 직장인이었다가 남자를 만나 잠시동안 '혼미한 시간'을 보내고, 정신 차려보니 직장은 없어지고 가겟집 새댁으로 역할 전환이 돼 있었던 거죠.

어어---하다가 거기에 가 있었던 거예요.

이래서 제가 젊은 남녀의 사랑은 '질병'이라고 단언합니다.

(변함없이 지고지순한 사랑을 유지하시는, 희귀한 분들 제외!)


저는 그때 부모님이 안 계시고 이미 결혼한 언니들이 있었지만 언니들이 제 결혼을 대신 결정해 줄 수도 없었죠. 그리고 주변에서 조언을 한다 해도 그 시점(사랑호르몬 과잉)의 결정을 바꾸기는 쉽지 않잖아요.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남자를 알아가지고 제 발등을 찍느라 후딱 시집을 가서 울며불며 살았어도 처음엔 잘살고 싶었어요.



어느 누가 결혼해서 처음부터 불화하고 미워하고 한탄하고 싶었겠습니까?

저도 예쁨 받고 싶고 시댁 식구들과 화목하게 한가족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전 살림을 정말 잘했어요.

집안청소, 온 가족 빨래, 요리는 당연하고 주택 방충망 고치기, 화단정리, 빨랫줄 매기 등 남의 손 안 빌리고 척척해냈죠. 시어머니 방청소에 자개장까지 반질반질 광나게 닦아놔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 무가치한 일에 매달려있는 제가 점점 초라하게 느껴졌지요.


시아버지, 시어머니, 가게 삼촌들 상도 매끼 따차려야 했어요.

가게 삼촌들은 "반찬을 사 왔냐"며 맛나게 먹고 가는데 가족들은 그냥 무덤덤. 감정의 나눔이 없었어요. 

새 식구가 애쓴다는 걸 알아주지도 않아서 항상 허망하게 베개를 적시며 혼자 잠들었던 새댁이었죠.


다음날이면 또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했어요. 

어른들 상을 차려드리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식사하는 것처럼 자리를 지켜드렸죠.

혼자 식사하시게 하는 것은 왠지 성의 없고 무례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랬죠.

그 노력은 제가 생각해도 정말 가상했어요. 


특히 시아버지는 이야기하는 걸 너무 좋아하시는데 아무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아서 혼잣말을 하고 계시더군요. 근데 새 며느리가 밥상을 차려놓고 코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니, 제게 눈을 맞추고는 눈을 떼지 않고 끈질기게 말씀이 길어져서 참 난감했어요. 


어른들은 제가 집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집살림 딱 끝내놓고 가게로 나와서 장사도 배우라고 하시는데 저는 막막하더라고요. 차차 밥상머리 며느리 노릇도 멈추게 됐지요. 

한 집에 살면서 외면하게 되고 입을 닫고 웃음도 시들고 감정표현도 하지 않고 수행자처럼 되대요.


그 외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수 없이 겪어내면서 결국 마음은 닫혀 버리고 영혼 없는 책임만 남았었지요. 결과적으로 처음 의도와 달리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들이 어긋나고 왜곡되고, 보람도 없이 시간을 거쳐오면서 결국 종지부를 찍고.


이젠 혼자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느덧 감정은 정화되어 갑니다.

시냇물처럼 맑은 기운이 저를 감싸주기를 기대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저도 지난 세월을 복기하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근데요, 때때로 젊은 시절 애달팠던 기억이 살아나서 흔적도 없는 흉터를 에일 때가 있어요.

이럴 땐 우스운 저의 <인생 배역론>을 들먹거리며 스스로를 달래 봅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 우리들은 모두 배우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올 때 이미 대본(DNA)을 지니고 왔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내가 우매해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거나, 저 사람이 현명해서 바른 선택을 했다고 자책하지 말자. 대본이 그렇다. 어떤 선택도 설정이다. 


이런 운명론이 제겐 유용하고 효과적입니다.

불편부당하다고 화를 끓이다가도 잠시 후 이 운명론을 소환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지요.

신체 활력징후가 고르게 회복됩니다. 제겐 만능이죠!


그리고 기다립니다.

다시 선택의 시기가 오면 자비 없는 선택을 하리라. 

대본을 수정해서라도 '다른 선택을 해야지'하고 다짐을 해요.


그런 건 에드립일까요?

아니 '진화'라고 할까요?


"어머? 혹시 이것까지 대본에 있는 거 아냐?"

피식 한번 웃고는 쓸쓸하고도 충만한 제 역할을 다하려고 다시 무대에 오릅니다.

이번생에 비주얼은 딸려도 분위기는 살리고......


다음 배역은 욕먹어도 좋으니까 한방 있는 걸로 기대함!


***모든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의 재산은 누구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