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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수분 Feb 15. 2024

일어서는 풍경(風景)

땅 밑으로 새봄이 쳐들어 오나 봄!

오늘 아침에 난 늦게 일어났다.

밤중에 여러 번 깨고 잠들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벌떡 일어나질 못한다.

시간 맞춰 출근하지도 않고, 시간 맞춰 밥 먹이고 케어할 식구도 없으니 24시간 내 맘대로 쓰는 자유가 참 좋긴 한데 게으름이 큰 문제다. 그래도 난 그냥 게으른 대로 살기로 했다.

오늘도 아침 날씨가 충충해서 침대에서 뒹글거리다가 느지막이 거실로 나왔다.


창밖을 내다봤다.

물이 가득한 저수지에 며칠 전, 청둥오리들이 새끼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한 집에 7~8마리씩 두 가족이 새끼를 거느리고 둥둥거리며 저수지를 차지했다.


새끼 없는 청둥오리들은 지들끼리 수풀 쪽에서 옹색하게 자리를 잡고 자맥질을 하고 있다.

오늘은 저수지 주인인 흰 왜가리 '일백이'가 안 보인다.

저수지는 오리가족들에게 내주고 일백이는 저 아래 하천으로 마실을 갔나?

난 일백이 새끼도 보고 싶은데......




커피를 한잔 마시려고 주방으로 갔다.

어제 친구가 갈아다 준 향기로운 커피를 내려서,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향을 먼저 깊이 마셔보았다.

신선하고 황홀한 향기가 주는 만족감으로 오감이 다 아찔해진다.

단일한 맛, 가장 너그러운 온도, 입안까지 개운해져서 입맛을 자꾸 다셔보았다.


커피를 받쳐 들고 다시 거실창밖을 내다본 순간, 뭐지?

이 느낌!

나도 모르게 발뒤꿈치를 높이 들고 가슴을 부풀려 보았다.

마치 대지가 부푼 것처럼 창 밖의 풍경이 한껏 들떠오른 모습이다.


저수지 주변의 풀밭, 작년 가을에 벼밴 논, 숲의 나무아래, 분명 아직 누런빛이긴 한데?

오늘 아침 게으름뱅이 나한테까지 생생하게 전해진

"우주의 기운, 대지의 부활, 계절의 환생"


이거 분명 내가 펴는 기지개는 아닌 거야.

누렇게 보이는 풍경 아래로 새것들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고!

연하디 연한 것들이 온 땅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게 분명해!




지난주 입춘날, 난 밖으로 나가서 창너머로만 보던 저수지 주변을 걸어 보았다.

'봄까치꽃'이 몇 알 피었고 양지바른 곳에는 '전호나물'이 벌써 새 잎을 수북하게 올려놓았다.

저수지 둑에는 고라니 발자국이 줄지어 찍혀있는 걸로 봐서, 사람의 길이 아니라 고라니의 길이라고 인정하고 얼른 돌아서 나왔다. 청둥오리는 내가 가까이 가면 푸드덕거리고 날아갈까 봐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그래도 아파트 12층에서 보는 것보다는 훨씬 가까워서 곁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내 집 울안의 식구들처럼 모든 것이 소중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날 내가 밟고 들여다본 흙 한 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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