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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수분 Aug 17. 2023

그때, 그 사람이 귀인이었어!

-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보건교사 공인중개사 되기

전직 보건교사가 이른 은퇴를 하고 40대가 넘어 공인 중개사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해야 할 책들이 월간 여성잡지만큼이나 두껍고 내용도 생소한 법률위주여서 도통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학원에 가서 상담을 했더니 수업하는 강의실을 보여 주면서 "저기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다 이 공부해요." 그러길래 들여다보니 과연 20대부터 60대로 보이는 학생들이 열공 중이었다.

용기를 내서 들고 가기도 어려울 만큼 두껍고 무거운 책 여섯 권을 사 갖고 집에 돌아왔다.



 

'시험에 합격 못하면 어때? 공부해 두면 상식도 쌓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겠네.'

일단 불합격이나 중도 포기를 보험 들듯 예비해 두고 책장을 넘겨 보았다.

매도인, 매수인부터 시작해서 도무지 뇌리에 흡수되지 않는 낯선 용어들이 난무하고 문장을 거듭 읽어도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독학을 포기하고 다시 학원을 찾아가 등록하고 두 달간 학원에 다니며 용어에 대한 개념을 익히고는 인터넷 강의를 신청했다. 8개월 열공 끝에 난이도 최악이라는 전설의 15기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자가 되었다!



내 맘에 안 드는 물건 고객에게 강추하기?

공인중개사가 되고 실무교육을 받고 5개월 만에 사무실을 등록하고 업무를 시작했다.

아뿔싸!

경험이 쌓일수록 '이것은 내 일이 아니로구나'싶게 자괴감만 커졌다.

계약서를 작성하면 그대로 지키는 줄로만 알았는데, 기상천외한 변수가 생기고 동종업계의 비겁한 술수와 육두문자 날아다니는 사무실에, 가장 못 할 일은 내 눈에 흠잡히는 물건도 고객에게 추천해야 하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일이 싫어졌고 내 사무실에 고객이 들어오는 게 썩 반갑지가 않았다.



비 오는 날만 찾아오는 젊은 이

사무실일은, 성실하기 그지없는 직원이 꾸려가고 나는 독서 클럽에 모이는 언니들하고 시간 보내기, 공연 보러 가기, 골프 연습장 열심히 다니기 등에 무심히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신발에 흙을 잔뜩 묻히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땅을 찾는 젊은 이가 있었다.

가족회사를 꾸리고  소규모 건축을 하는 젊은 사장인데 개발할 만한 땅을 찾으러 우리 사무실에 오는 거라고 했다. 맑은 날엔 현장에서 일하고 비가 오면 위치 좋고 가격 적당한 토지가 있나 하고 부동산 나들이를 하는 것 같았다.



사장과 고객으로 면을 트고 낯이 익어질 때쯤 그 젊은 이가 내게 제안을 했다.

"사장님, 중개사무실 하기 싫죠?

손님들도 사장님 불편해하겠어요. 표정이 안 좋아요.

저랑 같이 집 짓는 일 해 보실래요?"



한 방 맞은 듯 흠칫했다. 난 속을 들켜서 딴전을 피우며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일을 어떻게 한대요?" 무심히 흘려 말했다.

이후로도 내겐 고려할만한 관심사가 아니라 잊고 지냈는데  때때로 젊은 사장은 그 일을 내게 권했다.



타인이 귀인이 될 때

국토 균형개발 정책으로 우리 지역에도 신도시, 혁신도시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계획도시가 새로 생기는 부동산 시장의 호재는 지방도시에도 뜨거운 관심사가 되었다.

대기업에 다니던 나의 동창이 신도시에 다가구 주택을 짓고 싶다고 상담해 왔다. 그 젊은 사장과 연결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미팅을 잡고 함께 진행하는 중에, 젊은 사장은 다시 나에게 건축을 배워 보라고 권유하며 힘껏 돕겠다고 정식으로 제안했다.

난 부동산 사무실을 직원에게 넘겨주고 단 1%의 두려움도 없이 건축일을 배우기로 결정했으며 건축현장에서 청소부터 도면보기, 공정순서, 일정관리, 자재선택, 견적네고 등등......

규모는 작지만 착공부터 준공까지의 일을 15년 동안 반복하며 난 그 사이 직접 부동산 개발도 하게 되었다.  그때 특별한 인연도 없이 나에게 신의를 갖고,  내가 새롭게 열정으로 매진할 기회를 주었던 그 젊은 사장이 '내 인생에 귀인이  아니었을까?' 이제 와서 새삼 돌아보고 깊은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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