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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수분 Jul 03. 2024

호주댁 영숙에게

이태리 알프스 - 돌로미티를 추억하며

시드니의 7월은 겨울이야?

작년가을 네가 다녀간 뒤로는 서로 소식이 없었구나.

다행이야.

우리들 사이에 소식이 없다는 건 잘 지낸다는 뜻이니까.


다섯 아이들과 4차원 남편과, 한국의 식구들도 두루 안녕하시지?

아니, 이젠 4차원 남편이 아니지.

한결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동안 해온 외식사업에도 영숙이는 이제 신경을 덜 쓰겠구나.

점점 일은 줄이고 너의 마음은 더욱 고요해지기를 바래.

오로지 자기 성찰에 침잠하는 너의 마음 말고,

그냥 한없이 편안하고 안정되고 걸림이 없는 너의 마음말이야.


친구인데 언니 같은 영숙이!

우리가 스무 살에 만났을까?

간호대 학생으로 동아리 '산악회'에서 인연이 되었지.


어쩜 그렇게 지구력이 좋은지 너는 오로지 묵묵히 걷는 사람이었지.

불평도 없이, 날씨고 뭐고 아무런 탓을 하지 않았어.

나도 은연중에 너에게서 본을 받고, 그 고역스럽던 산행들을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


졸업 연도였던가?

설악산 훈련등반에서 선배들의 구타에 저항해 남녀동기 둘이 동반탈출했던 사건!

정말 쇼킹했고 그 용기에 저절로 리스펙! 리스펙!


그 후 너희 둘의 결혼과 호주이민 소식을 전해 듣기만 했었지.

외식 사업이 번창하고, 아이들 여럿 낳아서 잘 키우며 잘 살고 있다고.

산악회 동기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호주부부의 이민설화가 난 그저 신기하기만 했단다.


어쩌다 네가 귀국했을 때 잠깐 보는  말고는 우리 서로 잊고 살았지.

나도 섣부른 결혼과 육아, 일, 관계의 갈등으로 막막한 시간을 길게 보내느라......

그래도 뒤돌아볼 때마다 청년시절 함께 땀 흘렸던 동기들이 애틋하게 보고 싶더라.




2022년 여름!

우리 동기들, 모두 중년의 무게로 무장하고 다시 만난 곳이 이태리 돌로미티였지.

이태리 북부에 걸쳐진 알프스산맥.

거대한 암봉, 빙하의 눈물 같은 호수, 눈부신 초원과 야생화, 고단한 발길을 끌며 산을 내려올 때 가슴깊이 울려오던 워낭소리......


아침에 나서면 저~멀리 보이던 그림 같은 풍경 속을, 어느덧 우리가 걷고 있을 때의 흥분과 경이로움.

변화무쌍한 구름과 비, 마침맞게 나타나는 롯지, 현명한 가이드, 우리 일행들의 무사고.

매일매일이 근육통이었고, 작은 대화였고, 소식(小食)이었고, 깊은 잠이었고, 감사였고, 감탄이었지.


우리가 거기 머무는 동안, 3200미터가 넘는 만년 빙하봉 '마르몰라다'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났었지.

이상고온에 따른 빙하붕괴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시각 국내에서 오는 연락이 빗발쳤었잖아.

다행히 우리 일정에 마르몰라다산은 들어있지 않았고 우리는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쳤어.


겨우 2년 전인데 아득한 일인 듯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열흘간 함께 먹고 자면서 산행을 했더니 정말 스무 살 시절이 된 것처럼 설레고 좋더라.

그리고, 영숙이는 여전히 '묵묵히' 걷는 사람이었어.


호주집 가까이 국립공원이 있어서 매일 걷는다고 했지?

돌로미티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에 난 알게 됐지.

"너만의 외로운 시간이 꼭 필요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걷고, 사색하고,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일곱 가족과 공동체의 삶을 조화롭게 유지해 온 너의 성숙한 내면을 존경해! 

결국 자기의지 충만했던 동기남편도 이젠 네 뜻대로 따라주는 매너남을 만든 거야?

모든 일이 점점 좋아진다니 축하해.


우리가 돌로미티 트레킹 말미에 트레치메 산봉우리(세 자매봉)에 올랐었잖아.

그 산에는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군데군데 높은 봉우리마다 멀리 십자가가 보였어.

전쟁 때 죽은 군인들의 영혼을 위해 순례자들이 설치한 거라고 들은 기억이 나.

나도 거기서 자연과 영혼과 생명의 평화를 위해 정성껏 긴 기도를 올렸었지.


거대한 자연을 보면, 인생이 무상하고, 촘촘히 엮인 관계에 대해서는 좀 관대해질 여유가 생기거든.

자연 속에서 묵묵히 걷고, 보고, 사색하면서 지혜를 얻고, 자유를 누리는 것.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는 거 맞지?

우리 또 만나서 걸어가자, 친구!!!


2024년 7월 3일 / 돌로미티를 함께 걸었던 친구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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