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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수분 Sep 04. 2024

이제 어른이 된 나의 아기들에게

갓난아기였을 때 너희들의 향기를 그리며...

얘들아, 가을이 되었어.

세월이 갈수록 여름 보내기가 녹록지 않구나.

앞으로 태풍이 올 수도 있지만 가을은 안정되면서도 쓸쓸한 계절이지.


엄마가 이젠 일도 하지 않고 노인의 길목에 들어서는 인생주기를 맞았네.

그래도 아직은 건강하고 여러 취미활동 하면서 친구들도 자주 만나.

일 할 때가 그립기도 한데, 지금도 편안하고 좋아.


어쩌다 보니 이젠 너희들이 엄마의 보호자가 된 것 같구나.

너희가 든든하기도 하지만 엄마 입장에선,

"어? 얘들이 이젠 어른인가?" 하고 순간 서운한 생각이 한 번씩 들어.

그렇게 세대교체가 되는 시점을 엄마는 좀 일찍 느낀 편이야.


너희들이 유학할 때 엄마가 미국에 다니러 가면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

난 카드만 들고 뒤따라 다니고, 딸내미가 앞장서서 일처리를 척척할 때,

"너희들이 내 보호자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땐 특수한 상황이었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 씩씩한 엄마로 살아왔지만,

지금은 정말로 보호자가 뒤바뀐 것을 알겠어.

엄마를 걱정해 주고, 일상의 불편한 것들을 해결해 주고......


아기에서 어느새 엄마의 보호자가 된 너희들의 성장이 뿌듯해!


스스로 보호자가 되어 유학생활을 버티고 공학박사, 기술사가 된 딸!

엄마는 너의 노력과 고군분투를 존경해.

지금도 해외생활이니 고달픔이 왜 없겠니?

엄마는 네가 좋은 직장, 좋은 친구들 속에서 나날이 행복해지기만 바란다.


너희 둘이 유학을 마치고 아무도 귀국하지 않았다면 엄마는 어땠을까?

돌아와 줘서 고마워, 아들!

어쩌면 가고 싶지도 않았을 미국유학을 묵묵히 잘 견디고 돌아온 것도 고맙네.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누나의 도움과 조언대로 졸업까지 잘 마쳐서 얼마나 다행인지.

역시 아들도 직장생활, 취미생활, 원하는 만큼의 안정과 행복을 찾길 바래.


너희들의 청소년기에, 엄마가 곁에서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학교에 바래다주고, 데려오고 하는 일.

다른 엄마들이 다 해주는 뒷바라지를 못 해줘서 미안해.


어린것들이  타국에서 겪었을 외면과 외로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

천만다행으로 너희들이 큰 사고 없이 학업도 잘 마치고 이제 원하는 자리에 있으니 감사할 뿐이지.


너희들의 결혼에 대해서는 궁금하지만 캐묻거나 강요하지 않을게.

엄마아빠가 평화로운 가정생활을 못하고 헤어졌으니 결혼에 관한 조언은 삼가는 게 맞겠지.

너희들이 유학 가기 전까지 함께했던, 온전해 보이던 가족 내에서도 늘 긴장 속에 지냈지.

그때 무력했던 엄마의 모습을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차라리 우리 모두 지금이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너희들도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도망치듯 떠났던 너희들의 유학길에 부모불화가 원인이 된 거라 생각하니 엄마의 죄가 더 커지는 것 같구나.

그래도 대단한 것은 당차게 유학 간다고 선언하고 뜻을 이룬 딸내미의 용감한 결정능력이야.

거기에 또 뒤따라간 남동생까지 돌봐주고 누나노릇 톡톡히 했지. 고마워 딸!

우리 지금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좀 외로워도 평화롭고 자유롭게, 늘 소소한 행복을 '향유'하며 살자.


우리는 다 할 수 있어!



너희들이 아기였을 때,

너희들이 엄마를 찾으며 서럽게 울 때,

그때 달려가서 아기를 품에 안을 때,

그때 엄마는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


울음소리에 다급해서 아기를 안아줄 때,

아기 숨의 향기가 나를 뭉클하게 하고,

안도하는 아기의 호흡에 엄마도 뿌듯해지고......


너희 둘 다 엄마를 혼비백산하게 했던 일화가 있지.

울음을 그치지 않다가 숨 넘어간 사건이야.

입술이 파래지고, 숨도 쉬지 않고, 잠깐 축 쳐졌다가 다시 살아났지.

어쩌면 백일 무렵 아기들이 그렇게 까칠하게 엄마를 놀래킬 수가 있어?


어떤 사람은 자식 키울 때는 멋모르고 키웠는데 손주를 보니 예쁜 줄 알겠다고들 하더구먼.

엄마는 너희들 키울 때 정말 예뻐서 마냥 물고 빨고 키웠단다.


 엄마가 지금도 아기를 엄청 좋아하잖아.

그래서 외갓집 모임에 아기가 오면 엄마차지가 된단다.

우리 아기가 없으니까 어쨌든 아기만 보면 좀 구걸하듯 하지.하하.




우리 함께 다닌 여행도 많이 생각나네.

너희들 초등학생 때,

엄마랑 찾아다니던 유적지,

겨울에 자주 갔던 무주 리조트,

온 가족이 지리산 종주도 했었구나.


조그만 아이들이 종주등반을 하니까 마주치는 어른들이 엄청 칭찬을 해줬잖아.

너희들은 고단해서 울상이 되었다가도 어른들의 파이팅을 받으면 웃었지.

맑은 계곡물에 땀을 씻은, 발그레한 우리 애기들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


우리가 결정한 길을 걷다 보면,

오르막 내리막에 바윗길도 나오고 웅덩이도 만나고,

눈비 오고, 해도 지고 어둠도 오겠지.


그래도 다음 날

새벽 일출을 맞으러 산등성이에 오르자.

찬란한 해가 아니어도 붉은 기운을 향해 팔을 들자.

진주알 같은 태양의 조각이 항상 거기서 자라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다시 산봉우리에 오를 힘을 가졌고.


윤지야! 훈아!

엄마는 늘 너희들의 건강과 평화로운 일상을 기도해.


엄마 스스로를 위한 일상의 관리도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이번 주말에 삼촌 이모들하고 여행 잘 다녀올게.

엄마는 다 괜찮아!


2024년 9월 4일 / 엄마가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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