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보고 땅 팔기
2월 초순 충남 예산에 다녀오는 길, 차 안에서 왼손을 가슴에 얹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찌어찌 다, 잘 될 거야."
내가 나에게 하는 위로의 말이다.
전주에서는 발걸음 할 일이 거의 없는 낯선 지역이라, 아침 일찍 나서서 한나절을 보내고 외롭고 적막한 기분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스무 살 무렵부터 나는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의 선택과 결정, 책임 까지도 내 몫으로 알고 살았다.
국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취업이 확실한 간호사가 됐고 수술실 간호사로 숙련될 무렵 결혼과 함께 퇴직했다. 그 무렵 사립대학 병원은 결혼을 할 경우 퇴직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비자발적 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순순히 퇴직을 했지만 한 선배는 임신하고 배가 부른 채 근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직원 에게만 요구된 결혼퇴직 규정의 부당함을 홀로 시위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럴 용기도 없었고 출퇴근 거리도 멀어져 그냥 퇴직을 해버렸다.
전업주부로 남매를 키워 학교에 보내고 비정규직 보건교사로 재취업을 선택했다. 몇 군데 학교를 바꿔가며 근무하다가 이른 퇴직을 하고 공인 중개사 자격증을 땄다. 부동산 사무실도 운영해 보았지만 내가 할 일은 아니구나 싶어서 접고 싶던 차에, 가끔 집 지을 땅을 찾으러 사무실에 오던 건축업자의 권유로 소규모 부동산 개발에 참여하게 됐다.
남편이 대기업에 다녔고 집안에 큰돈 들어갈 일도 없어서 애들 어릴 때 종잣돈을 조금 마련했다.
신시가지 개발지역에 주택지를 한 필지 사 두었다. 나중에 마당 있는 주택을 짓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 짓는 일을 배워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권위적인 남편도 반대하지 않고 내 결정을 따라줬다.
아줌마, 현장소장되기
막상 집 짓는 일을 배우겠다고는 했지만 전공공부도 하지 않은 데다 여자로서 현장일 배우기는 막막했다.
페인트나 도배팀, 준공청소 등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간혹 있었지만, 나처럼 건축 전반에 걸쳐 현장 컨트롤을 하는 일은 거의 다 남자의 몫이었다.
현장일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청소 밖에 없었다. 청소를 하기로 했다. 현장이 쉬는 날이면 일복에 모자를 푹 쓰고 종일 현장 청소를 했다. 점심도 굶을 때가 많았다. 혼자 일하다 그 행색으로 식당에 가는 것도 내심 부끄러웠다. 우리 현장 일꾼들 눈에 띄면 그들이 불평했다. 사람을 써서 청소를 시키고 돈을 주는 게 맞다고.
그게 맞아도 '난 다 계획이 있으므로' 묵묵히 3,4층을 오르내리며 궂은일을 했다.
내겐 그것이 공부였고 '하자'를 찾아내는 정확한 점검이었다.
신기한 것이, 몸은 고단해도, 그동안 해온 어떤 일보다 건축일은 내게 맞았다.
도면을 볼 줄도 모르면서 '백번 보면 되지' 그래도 모르면 설계한 건축사에게 물어보면 되고.
매 공정마다 순서와 일머리를 익히려고 작업일지 쓰기, 그림 그리기, 큰 달력 뒷면에 순서대로 공정표 그리기 등을 근본 없이 연습했다.
현장소장 십 년이 넘어가면서 일머리가 막힘없이 꿰어졌다. 일하는 사람들도 처음엔 추천받았지만 나중엔 신뢰와 기술을 갖추고 나와 잘 맞는 드림팀으로 구성 됐다.
아줌마가 소장이 돼서 꾸려가는 현장이지만 민원해결도 매끄럽고 준공도 큰 문제없이 잘 맡아내는 소장이 됐다고 자신감도 생겼다.
우리 집도 내가 짓고, 의뢰인의 집도 짓고, 나를 포함한 우리 현장식구 모두가 함께 벌어서 가정살림하고 아이들 키우고 가르치고 형편이 나아지겠지 하는 보람으로 현장생활 십오 년이 훌쩍 지나갔다.
작년 시월을 마지막으로 이젠 새 현장이 없다. 대출금리, 건축비용 등이 폭등하고 경제가 불황이라 집 지을 사람도 귀해지고. 이럴 때 섣불리 일을 벌여 놓고 수습이 어렵게 되면, 그땐 도움 받을 뒷배도 전혀 없이 모든 게 나의 책임인데 주변 모두에게 민폐가 될까 봐 일을 접었다. 이런 사고방식 덕분에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사고 없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나에게 엄마 되기
혼자서 먼 길 다녀오며 스스로를 토닥이는 이 날도 땅 한필 지를 손해 보고 팔아오는 참이었다.
늘 혼자 운전하는 차 안에서 나는 혼잣말을 할 때가 많다. 내가 나를 달래는 말, 웃음, 전화하기 전 연습말, 한숨, 때로는 저절로 쌍욕이 나올 때도 있다.
그래도 사분 사분하게 위로의 말을 나에게 전할 때면 어쩔 땐 내가 나의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찌어찌 다, 잘 될 거야!"
지난 세월 동안 아이들은 유학을 마치고 각자 자리를 잡았고, 유능하고 잘생긴 남편과는 인연이 다해 헤어지고 나는 혼자가 돼있다. 내 부모님은 진즉 돌아가셨는데도 이제야 나는 천애고아가 된 기분이 든다.
나는 좀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다. 공감능력이 없어 그런가 싶기도 하고, 사는 동안 독해져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그런 내가 우는 날은 정해져 있다.
현장 터파기가 끝나 모두 떠나고, 나 혼자 뒷정리를 마친 후에 운전석에 앉아 어스름해가지는 하늘을 보면 느꺼운 울음이 치올라 왔다. 몸이 바닥에 쏠리듯 고단하고 내 처지가 안쓰러웠다.
그런 날에는 우애 좋은 내형제 칠 남매가 부모님의 선물처럼 가까이서 모닥거리며 사는 모습을 떠올리고 '내편도 있다'하면서 위안 삼았다.
꿋꿋한 내게도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다녀갔다.
아마도 혼자서 결정하고 혼자서 책임지는 세월의 무게가 켜켜로 쌓여 고인돌처럼 나를 짓눌렀던 걸까?
병이 너무 깊어지기 전에 손해를 감수하고 대출을 낀 부동산들을 팔아버렸다.
책임감이 줄어들수록 우울감도 줄어들고 결국 알량한 재산을 버리고 목숨을 구한 셈이 됐다.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생각하던 와중에 집까지 팔고 빈손이 됐을 때 신기하게도 심장이 평온해졌다.
지나간 육십 년 세월 동안 기쁘고, 슬프고, 고독한 일상을 견뎌내고 난 이제 모든 것이 괜찮다.
형편 주어지는 대로 순응하고, 옳다 그르다는 분별심도 버리고, 나에게도 너그럽게 대해주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한량으로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