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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수분 Nov 04. 2023

L여사의 너무 긴 하루

- 오늘, 나한테 왜 이래요?

밤 열 시가 다돼서 귀가하는 L여사는 애써 무표정하다.

빈 집에 들어서서 제일 작은 등 하나를 켜고, 손에 든 가방과 스카프, 차키를 차례대로 제 자리에 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목이 메이는 응어리가 답답하긴 해도 울지 않고 집에 돌아온 것이 잘한 건지, 자기 전에 울건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일이니까 분심을 내지 말건지, 여전히 무표정하게 생각에 잠긴 채.




오늘 아침 L여사는 삼 일 전에 보낸 메일을 상대방이 읽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고, 팩스로 한번 더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 갔다. 지난여름에 입주한 새 아파트의 커뮤니티 센터에 들어서자 공간을 메우고 있는 퀴퀴한 냄새가 당혹스러웠다. 순간 L여사의 미간이 좁혀지고, 손으론 입을 가렸다.

'이렇게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곳에서 상시 근무하는 직원들은 어쩌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관리실문을 밀고 들어갔다.


세 명의 직원중 앞쪽의 직원이 일어섰다.

막 출근했을 시간인데도 기력이 없어 보이는 직원이 L여사와 눈을 맞췄다.

서로 미소는 없었다.

'오늘이 목요일이라 피곤한가?'

L여사는 여직원이 생기 없을 이유를 잠깐 헤아려 보았다.


"여기서 팩스 한 장 보낼 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직원은

"246-어쩌고"

관리실 팩스번호를 불렀다.

"그게 아니고 팩스 한 장을 여기서 보낼 수 있겠나 해서요."


그녀가 L여사에게 손을 뻗었다.

L여사가 A4용지 한 장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팩스 번호는 서류 아래쪽에 써있네요."

관리실 여직원은 말이 없다.


'이런 거 부탁해서 귀찮은가?'

L여사는 괜히 쫄려서 옆 테이블에 있는 얇은 월간 발행물의 표지에 시선을 두었다.

평소 그녀는 어느 곳에 가든지 식물에 눈이 가고, 낯선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화초의 누런 잎을 떼주거나,

화분에 꽂혀 있는 이름표를 바로 세워 주거나 하면서 틈새 시간을 보냈는데, 이곳엔 딱히 시선이 머물만한 생물이 보이지 않았다.


팩스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됐네요." 하며 서류를 돌려주는 직원에게 L여사가 물었다.

"송신 확인이 됐나요?"

여직원은 팩스기기를 한참 건네보다가

"네" 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소리 내서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며

'다음에 까페라떼를 석 잔 사다 줘야겠다' 생각하는 L여사.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팩스를 받았을 상대방에게 전화를 했다.

기한이 정해진 서류라서, 불편하지만 이젠 직접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호가 길게 간 후에 L여사 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L여사는 먼저, 보낸 날짜를 말하고 이메일을 받았는지 물었다.

"자자, 천천히 합시다, 천천히." 남자가 말했다.

L여사는 전혀 서두를 의사가 없었고, 잠시 후 저쪽에서 메일이 안 들어왔다고 말했다.

새로 만든 메일계정이 뭔가 문제가 있나? 내 컴퓨터에 문제가 있나?

보냄은 정상인데 상대방은 안 왔다고 하니.

L여사는 당분간 옛날 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와서 해결해 줄 때까지는.


"방금 팩스를 보냈는데 확인 좀 해주시겠어요?"

"그래요? 천천히 합시다."

저쪽에서 몇 발자국 발소리가 들리고, 곧 팩스가 안 들어왔다고 응답을 했다.


"그냥 불러봐요, 내가 받아 적을 텡게" 남자는 L여사의 이름을 묻고, 재차 또 물었다.

A4 한 장의 서류라고 해봐야 인적사항과 몇 개 안 되는 항목의 신청서였다.

"저기, 혹시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 드려도 될까요?"

L여사는 굳이 격식이 필요치 않으면 서류한 장을 사진 찍어 보내버리면 좋을 듯싶어 물었다.


"그건 할 수 있겄어요?" 남자가 물었다.

"네?, 무슨, 사진 찍어 보내는 거요?"

L여사는 순간, 남자의 물음이 비아냥 인가 싶자, 혼자 운전석에 앉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 메일도 보냈담서 안 들어왔고, 팩스도 보냈다는디 안 들어오고, 긍게 허는 말이요. 누가 해 줄 사람도 없는가만? 보내보셔."

전혀 배려나 존중의 의사가 없는, 하대 하는듯한 남자의 촌스런 언어들이 L여사의 한쪽 고막에 콕콕 박혔다. 고른 호흡을 유지하면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고, 또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L여사.

"아-- 인자 됐쇼." 이 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리는 남자.




그녀는 아직 시동을 켜지 않고 차 안에 망연히 앉아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사모님, 팩스가 안 들어갔네요. 한번 더 오셔야 할 거 같아요. 지역번호를 안 눌렀나?"

"네, 됐어요. 해결했어요." L여사는 다음에 관리사무실에 갈 때 커피를 안 사 갖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매사에 오류를 원치 않는 L여사는 처음에 이메일을 보내놓고, 서류에 써있는 전화번호로 확인 문자를 남겨두었다. 상대방은 문자를 읽고도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확실히 전달작업을 마쳐야겠다 싶어서 시작한 일이 L여사를 이렇게 애처롭게 만들어 버린 거다. 체면 구겨가며 어찌어찌 일은 완성했지만 L여사의 오늘 아침 기분은, 막걸리 찌꺼기 같은 앙금이 명치께에 걸려 영 개운치가 않았다.


L여사는 이제 한 시간을 운전해서 아름다운 호숫가 카페로 음악과 브런치를 즐기러 갈 참이다.

아무래도 그녀는, 우아한 컨디션을 몸과 마음에 장착하려면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라디오를 켜고 차창을 내려 청량한 바람을 맞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외곽도로로 진입한 L여사의 차는 남쪽으로 달려간다.

지하차도를 두 개 지나고 다리도 몇 개 지나고,

익숙한 자동차 전용도로에 들어서자, KBS 클래식 FM '윤유선의 가정음악'에서 흥겨운 왈츠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음악에 심취하며 한창 익어가는 가을 풍경을 천천히 둘러본다.

그녀의 차가 자연스럽게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로의 램프구간에 진입하는 순간

"윽, 아뿔싸!" L여사는 얼른 라디오를 끄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쪽 길은  이사 가기 전 동네로 가는 길. 그녀의 차가 저절로 옛동네 길로 진입하고 말았다. 굳이 자동차 전용도로를 내려와서 시내를 거쳐 이삼십 분을 돌아서 또 전용도로로 올라가야 한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그렇지만 곧바로 괜찮은 듯 자신을 달랬다.


"이왕 이 쪽 길로 온 거, 여기도 가을풍경이 좋아"

노거수 팽나무는 황갈빛 단풍,  잎이 몇 개밖에 안 남은 벚나무는 홍붉은 단풍,

햇살을 받아 빛나는 억새꽃도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출렁이고......


애써 스스로를 달래는 그녀의  마음이 평정 되기도 전, 눈 앞에 광경이 난감하다.


"아우, 씨"

"참, 여기 새만금 고속도로 공사하지?"

요즘 L여사는 차 안에서 욕하는 걸 삼가는 중이다.

블랙박스에 녹음되는 거 맞지?


앞사발이 덤프트럭 행렬을 겨우 비켜 나간다.

길바닥은 이미 진흙탕 물이 잘박거린다.

아직 세차할 때도 안됐는데......


거기다 또, 계기판에서 L여사의 시선 속으로 훅 들어오는 황금색 별빛!

휘발유 엥꼬!



복식호흡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핸들을 바르게 잡고 몸을 세웠다.

시간도 연료도 많이 쓰고, 늦게 카페에 도착해서 듣는 음악이, 특별히 흑인 여가수의 목소리가 절절히 그녀의 가슴에 와닿았다. 젊고 예쁜 감상회원들과 간단한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탁구가 좋은 운동이라고 L여사에게도 시작해 보라고 권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제 중년을 넘어 초로의 나이가 된 그녀는 새로이 무엇을 배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운동이든, 공부든 지금 하고 있는 것들도 차츰 강도와 횟수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녀다.

L여사의 근성은, 무엇이든 잘하고 싶어서 심히 공력을 들이므로, 그 욕망이 해가 될 수 있음을 그녀도 요사이 경계하는 중이다.


L여사의 오늘 일정은 한 번 더 장거리 운전을 하고 다녀올 데가 있었다.

그녀는 뒤늦게 야간대학에 다니는 중이고, 대부분 온라인 강의를 듣지만, 오늘 꼭 대면수업에 참석하라는 교수의 문자를 받았었다. 차에 연료를 채우고 늦지 않게 출발해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학교에 도착, 짧은 수업을 마치고 다시 밤운전을 하고 돌아오는 L여사의 귀갓길.


모악산을 지나 외곽도로를 바꿔 타려면 한차례 램프구간을 내려가서, 저쪽 도로를 올라타야 한다.

그녀는 익숙하게 오른쪽으로 내려섰다.

전에 없던 회전교차로 공사 중이어서 도로가 어수선하고, 밤시간이라 그녀는 긴장하고 전방을 주시했다.


그녀가 주춤주춤 겨우 외곽도로로 올라섰다!


"엥?" 뭔가 쎄--하다.

"어라?" 다시 모악산으로 가고 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단순히 울지 않으려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너의 현실을 받아들여"

"너는 느리고, 한 번에 못하고, 반복해서 손해 보고, 서러운 마음이 들 거야."

"잘하려고 하지 마, 아주 천천히, 잘하고 싶은 너의 진실된 욕망을 버려라!"라고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는 거였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려는 '하심훈련'을 이제 막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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