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김혜진 작가)를 읽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 IMF가 터졌다. 이러다 취직조차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절이었다. 이런 조급함이 우리를 변하게 하고, 원치 않은 일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일’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인지, 일이 주는 무게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육아로 인해 회사를 더 이상 다니지 못했지만, 만약 내가 계속 회사를 다녔다면, 나는 회사라는 곳에서 어떤 위치가 되었을지. 나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주인공은 통신회사 현장팀에서 26년을 근속한 사람이다. 그는 저성과자로 분류되어 세 번째 재교육을 받기 직전이다. 그때 새로 온 부장이 그를 호출한다. 부장은 그에게 권고사직을 권유한다. 자신과 같이 일하던 동료들조차 연장자가 자진해서 나가주길 바라고, 평가 점수에 따라 다른 곳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만둘 수 없다. 그에게는 몇 달 전 변두리 오래된 다세대 건물을 매입(대출을 끼고)했고, 아직 고등학생 아들이 있다. 아내는 마트에서 2교대로 일하고 있지만 들어갈 돈이 너무 많다. 다세대 주택의 누수 수리비, 대출금과 이자, 자동차 할부금, 아이의 학비와 다양한 경조사비, 그리고 장인의 병원비와 노모 주택의 수리비까지..
아직 들어가 갈 돈도 많고 어떤 미래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부장의 권고사직 제안을 거절하자 그는 타 지역 거점 센터로 발령 난다. 그곳에서 그는 인터넷 상품 영업 일을 시작하지만 계약은 성사되지 않는다. 그렇게 월급은 30% 삭감되고, 그는 깨닫게 된다. 회사는 자신에게 새로운 일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도 시키지 않는다는 걸. 성과가 없으니 촉구서가 이어지고 그는 다시 지방 소도시 시설 1팀 ‘분기국사’로 발령 난다. 이곳에서 인터넷 수리와 설치 및 보수 업무를 하며 일상을 되찾으려 하지만 휴가를 내고 친구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사에 참석하고 온 다음 날 무단결근 통보를 받게 된다. 이후 그는 노조에 가입하고 투쟁 끝에 본사 소속이 아닌 하청업체 소속으로 변두리 소읍인 78구역으로 복직한다. 그는 이곳에서 통신탑 설치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대치하게 되는데..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나는 언제까지 일할 수 있었을까? IMF 이후로도 다양한 형태로 직급이 있는 사람들은 권고사직이나 명예퇴직을 제안받는다. 버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버티는 사람이나 나가는 사람이나 힘든 건 다 마찬가지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있고, 늙어가는 부모님이 있고, 많은 돈을 저축한 것도 아닌, 여기저기 나갈 돈만 수두룩한 우리네 남편들과 아들들.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전업주부가 되었지만 어떻게든 다시 일해야 하는 건 아닌지. 왜 이렇게 먹고사는 문제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슬프고 아프다.
하청업체 소속으로 마을 주민과 대치해야 하는 남자는 그들과 똑같이 시골 어딘가에 부모님이 존재하고 부모님을 위해 효도하려고 하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다. 아직 나갈 돈이 많고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한다. 마을 주민에게는 나쁜 놈이지만 남자도 회사에서 하라고 하니까 할 수밖에 없다. 이걸 못하면 회사에서 잘리기 때문에..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일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바뀌어버리는지 깨닫게 될 거였다. (252)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몸부림.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회사를 위해 욕을 먹으며 해야 할 일. 그런 일을 누군가의 아들이, 아빠가, 남편이, 친구가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슬프다.
노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게 아니라 삶이 어그러진다. 만약 내 남편이, 내 아이가 이런 상황이라면 나는 어떤 충고를 하게 될까? 힘들면 그만둬. 아니 이런 상황이 오기 전에 그만두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내 남편이, 아이가 회사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흐를 것 같으니까. 하지만 우리네 아빠나 남편들, 아이는 그걸 내색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은 시작되는 건지도. 책을 읽는 내내 남편의 마음이, 아이들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팠다. 일에 대해, 그리고 중년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내 남편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한, 지금은 내 남편의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나중에는 결국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 슬픈 이야기.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 두 아이를 키운다. 철없는 아이들이지만 서서히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 고민하는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읽고 싶었다. 일이라는 게 내가 원해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부모인 나는 어떤 충고를 하게 될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