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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마음 안에 쌓아두지 말기

맨홀(박지리 작가)을 읽고

by 꿈에 날개를 달자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했던가? 그럼 딸은 엄마를 그대로 닮아가겠지? 작은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고민을 많이 했다. 아니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성향이 다르고 기질이 특이해 이 아이를 내가 잘못 키운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 이런 내 고민에 먼저 아이를 키운 분들이 충고해주길 그 시기가 지나면 다 괜찮아진다는 것이었다. 훗날 나도 이 모든 시간이, 추억이 되길 바라며 참고 있지만 가끔... 작은 아이를 보면 울화가 치민다. 하지만 그럴수록 참고 견뎌야 한다는 말에 눈을 감아버리곤 한다. 성숙한 인간이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참을 인자를 마음속에 그린다. 그리고 맨홀이라는 책을 읽었다. 미치도록 싫었고, 벗어나고 싶었던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맨홀이란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뚜껑이다. 그리고 그 뚜껑 아래 거미줄처럼 이어진 도시의 지하세계. 결국 그 지하세계를 연결하는 문은 바로 ‘맨홀’이겠지. ‘맨홀’은 한 소년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방관이었다. 평생 폭력과 의처증으로 온 가족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지만 어느 날 열여섯 명의 목숨을 구하고 숨져 영웅이 되었다. 매일 아버지의 폭력으로 힘들어 하지만 어머니는 늘 똑같은 모습으로 아버지를 출근시킨다. 제발 헤어지라는 말에도 엄마는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누나와 함께 달아난 곳은 맨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공사장의 맨홀은 소년과 누나에게는 안식처다. 시간이 지나 누나는 누나만의 관심사가 생겨 맨홀과 멀어졌지만 소년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혼자 남겨진 소년은 여자 친구 희주와 맨홀에서 발견한 강아지 달이와 이 곳에서 작은 행복을 맛본다. 하지만 이곳에 아버지의 감사패와 훈장을 버림으로써 맨홀은 더 이상 소년에게 위안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이곳에 시체를 갖다 버리게 되는데....


혐오했던 아버지지만 아버지가 죽고 나서 누구보다 슬픈 표정을 짓던 엄마와 누나. 소년이 살인자가 되니 누구보다 활발히 소년을 구제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의 업적(?) 덕분에. 의로운 소방영웅의 아들.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그렇고 그런 스토리를 만들어 결국 보호관찰 1년의 형을 받고 16주의 재활센터 교육이 결정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년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버지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아버지와 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소년. 하지만 누구보다 아버지와 닮아가는 자신을 보며 소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두운 부분이 있다고 한다.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분위기에 컸느냐에 따라, 자신의 기질에 따라 우리는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어른이 된다. 소년에겐 인생이 맨홀의 어두운 구멍만큼 깜깜했던 모양이다.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구멍에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을 보면. 누나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곳에서 위안받고 사랑받는다 느꼈다면 좋았을 텐데, 소년은 자발적 왕따에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상대를 조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모든 것을 마음 안에 두고 켜켜이 쌓아두지 않았더라면, 누나의 홀로서기나 엄마의 홀로서기를 인정할 수 있었더라면 이런 슬픈 일은 없었겠지. ‘서른이나 마흔이 되어 다들 그러는 것처럼 ’ 미안하다 ‘라는 그 쉬운 한마디에 지난 일을 다 묻어 두고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내 입에서 아버지, 라는 소리가 나오게 될까 봐 정말 두려웠다.’ (160) 용서하는 순간이 다가오는 게 왜 두려웠을까? 차라리 용서하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맨홀 뚜껑 아래 어둠. 상상하고 싶지 않고 어둠 속에 날,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가두고 싶지 않다. 나란 사람도 무한 긍정을 발산하는 사람은 아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그 둘을 동시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 일 혹은 슬펐던 일은 가능하면 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음을 이젠 알게 됐으니까. 아버지의 폭력은 분명 나쁘다. 소년의 엄마가 소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달랬다면 소년의 뭉친 마음이 풀어졌을까? 그리고 어둔 마음을 간직하고 살았을까? 우울하고 아픈 소설이다.


박지리 작가의 두 번째 소설. 박지리 작가의 모든 책은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특히 사춘기 아이들과 지지고 볶고 싸우는 날이 많다면. 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혼란한 시간을 보내는 거라고, 부모는 사랑으로 아이를 바라봐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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