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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Nov 02. 2020

언니, 괜찮아요 말 안 해도 돼요

  꽃피는 봄에 나비로 날아간 간암 환자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참 얼굴도 예쁘고 이름도 예뻤다. 우리 엄마랑 동갑이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유난히 그녀에게 애정을 많이 쏟았다. 그리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남았다.     


  간암. 참 잔인한 병이다. 심지어 재발이었다. 이미 간엽절제술(간의 종양이나 외상, 때로는 간내결석증의 경우 등에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절제술), 간암화학색전술(TACE,간종양의 치료에 가장 많이 시행되고 있는 시술로, 간종양에 영양을 공급하는 동맥을 찾아 항암제를 투여한 다음 혈액을 차단하는 치료법. 암의 진행 정도에 대해서는 크게 제한이 없기 때문에 적용 범위가 넓고, 심한 황달 또는 복수가 나타나지 않으면 시술이 가능), 고주파 열치료(RFA, 경피적으로 종양에 전극을 삽입한 후 고주파를 발생시켜 여기서 생긴 열로 암세포를 태워 제거하는 치료법) 등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해본 그녀에게 더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암세포는 속절없이 자라났고 복부통증의 괴롭힘도 날이갈수록 심해졌다. 고용량의 주사용제 마약성 진통제 없이는 병원 앞 정원에 산책 나가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그렇게 5시간마다 찾던 진통제는 용량이 늘어나도 3시간마다, 1시간마다 잦아져왔다. 그래도 그녀는 웃었다. 가족들과는 항상 어린아이 같은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까지 기분 좋게 만들었다. 혹여 진통제를 조금 늦게 가지고 들어갈 때면 “어! 거북이가 약도 가져오네!” 라는 등의  말이다. 힘든 근무 중에도 웃을 수 있던 힘이었다.     


  ‘어머나!’ 하는 큰 소리가 간호사실까지 들려왔다. 다인실 환자들은 배선실에 있는 공용 냉장고를 썼는데 그녀는 청소 여사님의 냉장고 청소를 돕다가 뒤로 넘어졌다고 한다. 낙상이다. 낙상은 원내 위험사고 중 정말 흔하지만 환자 안전에 치명적일 수 있는 일이다. 그녀는 엉덩이 통증에 배선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은 움직일 수 있다는 말에 동료들과 그녀를 휠체어에 태워 침상으로 향했다. 주치의에게 알리고 통증을 호소하는 골반부위에 서둘러 엑스레이를 찍었고 판독 결과 경미하게 금이 가 있었다. 마냥 씩씩하기만 한 그녀가 울었다. “나 이제 멀쩡하지가 않나봐. 혼자서 막 넘어지고 그래. 미안해 바쁜데 나 넘어져서 일만 만들고.” 라며 한참을 울었다. 우는 그녀 곁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한참을 곁에 앉아 “아 속상해 죽겠네. 이제 화장실도 혼자가지 마세요. 저랑 같이 다녀요. 어떡하며 좋아 진짜!” 라며 마음 아픈 투정을 잔뜩 부렸다. 낙상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꽤나 성가시다. 육하원칙을 지켜 보고서를 작성하고 앞으로의 예방책까지 생각해내야 한다. 처음으로 귀찮음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낙상보고서를 작성했다.     


  얼마 후 소식을 들은 화목한 그녀의 가족들은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남편도 노발대발 화를 내며 병원에 왔고 딸도 눈물을 한바가지 흘리며 간호사실로 전화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봤어야 되는데...” 가족들은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속상해서, 그 때 옆에 있지 못했던 게 미안해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했다. 그런 한탄도 들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됐었다.     


  새벽 다섯시, 나이트 근무의 활력징후 측정시간이다. “왜 갑자기 숨이 찬거야? 아파서 그런가?” 라는 그녀의 물음에 “우리 몸 속 혈중 산소포화도의 정상수치를 95% 이상이라고 하는데 지금 수치가 90%도 안나와요.” 라는 의학적인 정답을 이야기하기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 그게...음...” 의미없는 말줄임표만 반복했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딸은 내 표정을 읽었다. “언니, 괜찮아요. 괜찮아. 내가 알아들었어.” 라고 나를 위로하더니 이내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아프니까 당연히 숨차지! 나도 아플때 숨차더라. 그럴 수도 있지. 조금 있으면 나아질거야. 더 자.” 엄마에게 안심을 주는 딸의 차분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당직의한테 전화를 걸었다. 산소포화도가 낮다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당직의는 산소요법을 시작하자고 했고 나는 코를 통해 산소를 공급하는 세트를 한자에게 들고가 설명을 하고 그녀의 딸은 또 한 번 웃어보이며 말했다. “언니가 수고가 많네.” “저 오늘부터 3일 쉬고 와요. 그 때는 이거 다시 빼고 있어야돼요. 약속해요.” 환자에게 일방적인 약속을 걸고 무거운 마음으로 퇴근했다. 그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기적이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3일의 휴일 동안도 가끔 걱정이 됐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이브닝 출근을 했다. 산소카운트(매 근무마다 출근하자마자 물품의 개수를 세는 업무)를 하는데 그녀의 이름이 없었다. 가슴 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내가 출근하기 한 시간 전 임종실을 떠났다고 한다. 떠난 자리를 괜히 한 번 가봤다. 정리되지 않은 이부자리들, 보호자들이 놓고 간 소지품들만이 어수선했다. 그녀는 굉장히 힘든 마지막을 보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숨이 차오르는 고통을 모두 느끼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에게 그렇게 쿨한 모습만 보여줬던 그녀의 딸은 기절할 정도로 울다가 겨우 자리를 떠났다고 했다. 차라리 마지막을 보지 못한 것이 잘된 편이라고 생각하고 담담하게 임종실 정리를 도왔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딸이 쇼핑몰을 한다고 자랑을 하고 아들이 올 해 대학에 갔다고 기뻐하던 그녀는 우리 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고 했다. 8시간의 근무 내내 고민을 했다. 마지막 그녀의 공간에 잠시라도 들르고 싶었다. 그런데 환자의 장례식장에 가도 된다고 학과 공부 4년, 병원 생활 1년 동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못갔고 장례식장 대신 퇴근 후 술을 마셨다. 내 환자가 떠났다는 이유로 마신 처음이자 마지막 술이었다. 얼마 전 ‘슬기로운 의사생활’ 이라는 TV드라마의 재방송을 보고서야 배웠다. 

‘아, 나 장례식장 가도 됐었구나. 그랬으면 이만큼 후회가 남지는 않았겠구나.’      


  시간이 많이 지나고도 생각이 났다. 그녀가 몇 달을 자리했던 간호사실 바로 앞 5인실의 창가자리는 비워진지 오래 지났다. 그 자리 한 칸이 그렇게 크게 느껴질 줄도 몰랐다. 평소에 환자들이 좁다고 서로 눈치싸움을 하는 겨우 낡은 침상 하나 들어갈 자리인데 말이다. 그녀가 떠난 후 몇몇의 환자들이 그 자리를 썼다. 물론 그 중에는 탈원을 하는 등 내 속을 썩이는 환자도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 자리에서 단 한 번도 나를 힘들게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애정하는 그 자리가 뺏겼다는 생각에 더 화가 났다. 참 서툴렀던 나는 라포 형성이 무엇인지 그녀에게서 배웠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보다 더 가까워져서 그게 문제가 되었지만 그녀에게서 환자 사랑을 배웠다. 나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애정을 쏟았고 그녀와 나의관계는 유한했지만 그녀는 그 어떤 공부로도 배울 수 없었던 간호사의 역할을 가르쳐주고 떠났다.     


  가끔 병원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녀와 나의 이야기를 해주곤 한다. 어떻게 감당했냐는 물음에 “감당못하지. 그냥 가끔 떠올리면서 살아.” 라고 답변 하곤 한다. 임종 간호를 셀 수 없이 많이 하는 곳에서, 쏟아지는 업무에 치여 삶과 죽음과 환자 하나하나의 마지막을 나 자신도 모르게 무뎌질 때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한 사람의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인데 말이다. 일반적인 감정체계를 가진 사람으로서 ‘이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말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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