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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Nov 02. 2020

맞은 게 틀렸을 때

  1년의 휴학 기간 동안 첫 6개월은 공부를 했었다. 다시 수능 공부를 해 다른 전공을 찾아보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부모님을 설득해 유명하다는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수능까지의 남은 기간 동안 재수학원에서 정말 좋은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학원에 다녔다. 이 한 문장으로 알 수 있듯 결과는 당연히 좋을 수 없었다. 물론 몇 가지의 선택권이 생겼으나 아주 오래 생각한 결론으로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생 간호사가 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6개월이 문제였다.      


  돈은 없지만 시간은 넘쳐 흘렀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해봤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방송부 활동을 하며 공연기획, 연출 등에도 관심을 키워나갔었다. 공연계에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자리가 있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이하 월디페라고 칭하겠다.)에서 ‘월깨비’라는 기획 스태프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시의 고민도 없이 신청했고 결과적으로 월깨비가 되어 월디페의 스태프가 되었다. 주 1회씩 모임을 가지고 공연기획, 연출을 전공하는 여러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들과의 회의에서 창의적으로 생각하기, 독창적인 아이디어 내기 등등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고대하던 월디페날이 왔다. 처음으로 춘천에서 진행했었고 스탭인 우리들은 페스티벌 하루 전 날부터 도착해 축제를 즐겁게 만들 준비를 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부터 문제가 생겼다. 알 수 없는 복통이 계속 되었다. 상비약으로 가지고 다니던 소화제, 진통제를 먹어도 복통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함께하는 스탭들에게 괜히 걱정시키기 싫어 거의 먹지도 못하는 채로 이틀 정도를 버텼었다. 지인들도 페스티벌에 왔던 터라 억지로 더 웃으며 참아봤지만 복통은 계속 심해지기만 했다. 결국 이틀이 지나고 맞이한 새벽, 강원대학교병원 응급실을 찾게 되었다. 그것도 처음 뵙는 다른팀 스탭분과 함께였다. 감독님이 혼자서는 안된다며 급히 다른 분을 불러 함께 가도록 하신 것이다. 난생 처음 뵙는 분과 보호자와 환자의 관계로 응급실이라니. 죄송해서 접시물에 코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

다. 응급실에서는 스트레스성 위, 장 경련이라고 했다.      


  이제와 고백하건데 그간 몇 달간은 사실 재미있고 신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놀기 좋아하는 나지만 새로운 사람들, 그것도 그 분야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의 나는 너무나 작아보였었다. 언제, 어디서나, 어느 집단에서든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라고 또 그렇게 지내왔던 나였기에 이렇게 겉도는 느낌을 몇 달을 지속하니 자연히 스트레스가 따라올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월디페 진행의 끝까지 참여는 어렵다는 판단 하에 중도 하차하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나와 그 길로 숙소에서 짐을 싸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스탭들의 걱정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왔지만 카카오톡 단체톡방은 여전히 바빴다. 그 중 연예인 누가 왔더라, 누구와 사진을 찍었다 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소식들이 가득했지만 내가 오로지 부러운 것은 월디페가 끝난 후 스탭 백여명이 메인 스테이지에 한가득 모여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에 껴있지 못한 내 자신에게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뭐가 그렇게 기가 죽어서, 뭐가 그렇게 신경쓰인다고 버티지 못했던 내가 너무 미웠었다.      


  월디페 스탭 준비를 하며 스태프들에게 자원받았던 KBS특선 다큐멘터리 ‘새벽 4시 7번칸의 기적’ 특별 기획팀에도 참여했다. 공중파 방송에, 그것도 방송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라니 나로서는 안 할 이유가 없는 경험이었다. 이 때 같이 진행하던 분들도 KBS 다큐멘터리 PD님, 류재현 감독님, 또 작가님들, 기획 스태프들이었다. 매주 회의를 하며 내가 하나의 방송을 만들어나간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지고 참여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 때도 한 풀 꺾여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디어 회의라는 것이 ‘O' ’X' 라는 대답이 확실히 나와야 진전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조금 어렸던 나는 나의 아이디어에 ‘yes' 라는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또다시 소심해졌다. 그래서 자리만 차지하는 회의를 계속 하고 있었다.      


  그렇게 촬영날은 다가왔고 우리나라 첫 차인 동대구역발 서울행 새벽 4시 기차의 7번 칸에 탄 사람들을 위한 다큐멘터리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밤을 새워가며 성공적으로 촬영을 마치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안도감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마치 포크질도 어려워하는 어린아이가 젓가락을 콩 100개를 옮겨놓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기회와 경험에 욕심을 부려봤으나 욕심도 과유불급이라고 벌을 받은 것 같았다. 방송날 텔레비전 앞에 가족들을 불러 모았고 마지막 이름이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에 오른 내 이름을 보며 뿌듯함 10%, 미안함 90%였다. 내 이름 석자가 올라갈 만큼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1살이라는 갓 성인이 된 나에게 도전하는 방법, 즐기는 척 하는 방법을 세세하게 가르쳐 준 일들이었다. 더불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경험을 통해 결코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다가온 절망감은 쓰나미와도 같았다. 어쩌면 그 6개월의 기간 동안 다른 일들을 더 접할 기회가 있었을 지도, 혹은 그랬다면 그 중 나에게 더 맞는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나는 다시 쓴맛을 충분히 맛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누군가 나에게 과제를 내줬으면, 시간표를 짜주었으면, 나에게 규칙이란 걸 내려줬으면, 내 길을 만들어줬으면, 그런 마음이 커져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던 당당한 뒷모습은 잊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하든간 꼭 최고가 된다거나 전문가가 되어야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열정이라도 가져야 한다. 그 열정을 자신에게 박수쳐줄 수 있을 만큼 모두 쏟아 부었을 때, 그 땐 후회가 이만큼은 남지 않는다. 다만,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어영부영하게 지나치다보면 그게 그렇게 미련이 남는다.      

‘혹시 그 때 조금 더 했으면 조금 괜찮았을까?’ 이미 지나가버린 일들에 대한 의미 없는 후회들 말이다.      


  주로 쇼핑을 인터넷으로 하는 편이다. 100번 중 5번 정도는 실패를 하게 되는데, 맞지 않는 옷을 배송된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택배 업무를 불편해 해 반품, 환불 같은 것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작은 신발을 신고 나갔다. 하루종일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마주치게 된다. 예를 들면 웃을 때마다 바지의 단추가 튀어나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너무 꼭 맞는 블라우스 때문에 하루종일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배에 힘을 주고 다니기도 했다. 또, 작은 구두를 신겠다는 고집으로 발뒤꿈치가 다 까져버려 길가의 편의점에서 슬리퍼를 사 신은 적도 있다. 분명 나에게 맞는 것은 따로 있었을텐데 말이다.      


  나에게 맞추겠다는 생각을 하기 귀찮아서 내가 맞춰지려고 했다. 그게 맞는줄만 알았다. 앞으로 나는 환불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될거고, 반품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본인에게 맞는 것들을 찾아나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택은 잘못될 수 있다. 그 잘못된 선택은 미련도, 후회도 같이 꾹꾹 눌러 담아서 다시 보내버리면 된다. 그리고 다시 찾아나서면 된다. 내가 맞다고 생각한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을 확률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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