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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Feb 03. 2022

내 맘대로  안 되는 나

1. 나는 왜 거울에 비친 나를 사랑할까? 

I. 내 맘대로 안 되는 나


세상은 원래 거기 있었다. 내가 처음 세상에 나온 순간 환한 얼굴로 반겨 주던 부모가 거기 있었다. 하얀 벽, 낯선 바람, 이상한 소리들…. 모든 것이 막 태어난 나보다 먼저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본 사람에게 낯을 가리고 누구에게 오해를 사고 오늘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세상에 나만 불쑥 던져진 거니까.     


그 안에서 나는 처음 만난 어머니(양육자)와 눈을 맞춰야 하고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야 한다. 그러려면 그들의 말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나는 어머니의 말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나와 같은 듯 다른 사람들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그 안에서 크고 작은 관계가 만들어진다. 세상을 순조롭게 살기 위해 관계만큼 중요한 건 없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맘 같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다가도 어느 순간 분노가 치밀어 관계를 망쳐 버리고는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할 때, 매 순간 이성적이라 자부했는데 갑자기 무너져 내려 한없이 작아진 내 모습에 속상할 때,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헷갈려서 고민일 때, 관계와 삶의 목표 때문에 괴로울 때 우리는 어느새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숱한 관계 속에서 울고 웃다가 문득 내가 왜 이럴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결국 내가 문제인가? 궁금해진다면 한 번쯤 나의 중심, 저 깊숙한 곳에 있는 진짜 나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일이다.  그림책과 함께 ‘나’를 탐구하다 보면 ‘너’와 ‘우리’를 이해하게 되는 건 덤이다. 결국 관계 속의 개인일 수밖에 없는 '나'는 어느새 그 관계 속에서 행복해지는 길을 찾고 있을 것이다.



1. 나는 왜 거울에 비친 나를 사랑할까?


우리는 늘 거울을 본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보고 세수하고 보고, 옷을 입으면서도 밥을 먹고 나서도 본다. 그렇게 자주 본다는 건 거울 속에 비친 ‘나’를 좋아하기 때문일 거다. “왜 이렇게 못생겼어?”하고 투덜대면서도 거울을 보는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번진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는 표정!

어떤 이는 얘기할 것이다. “무슨 소리야? 난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안 좋아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거울 속 내가 예뻐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울 속으로> 표지

《거울속으로》, 이수지 글 그림, 비룡소


우리는 왜 거울을 그렇게 자주 보고 거울 속에서 나를 확인하고 거울 속의 ‘나’를 사랑하기까지 할까?  나를 이해하는 것과 거울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수지의 그림책 《거울속으로》를 보면서 하나씩 의문을 풀어가 보려 한다.


그림책은 세로로 긴 판형인데 오른쪽 면의 아래에 한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아이의 표정은 밝지 않다. 아니, 슬프거나 외로워 보인다. 왼쪽 면은 비어 있다. 그런데 다음 장에서 왼쪽 면에 한 아이가 나타난다. 오른쪽 면의 아이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웅크리고 있던 오른쪽 아이가 왼쪽 아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두 아이는 제본선을 경계로 대칭을 이룬다. 이쯤 되면 독자는 왼쪽 면이 거울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거울을 보면서 상대방을 탐색한다. 몰래 쳐다보기도 하고 비춰 보기도 하고 메롱 거리기도 하면서. 그러다가 그게 거울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마주 보고 있는 아이가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둘 사이에 뭔가가 피어오른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랄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는다. 둘은 이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행동한다. 표정에 자신감이 넘치고 아주 행복하게 날아오른다. 

  

면이 겹치는 부분을 경계로 데칼코마니로 처리된 그림은 정확히 거울로 인식되면서 아이의 환희를 두 배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둘이 점점 합쳐진다. 두 아이는 현실과 거울 사이의 경계를 기준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라진다. 거울에도 현실에도 아이는 없다. 양쪽 면 모두 하얗게 비어 버린다. 이 부분에서 그림책을 보던 사람들은 대부분 많이 놀란다. 무서워하기도 하고. 


인간은 거울을 통하지 않고는 내 모습을 완벽하게 볼 수 없다. 성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울을 본 아기라면 어떨까? 라깡이 말하는 거울 단계, 즉 거울을 통한 자아의 형성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기가 처음으로 거울 속 이미지를 자기 모습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일어난다.

     

태어나서 얼마 안 된 아기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아기의 눈에 보이는 자기 모습은 팔, 다리, 손, 발 같은 부분들뿐이라 아기는 자기 몸이 원래부터 따로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 파편화된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다가 거울 속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날이 온다. 물론 양육자인 어머니가 “저게 너다”라고 가르쳐 주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알아본 아기들은 하나같이 탄성을 지르며 좋아한다고 한다. 거울 속 이미지가 너무 완벽하고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실의 자기는 파편화된 몸을 지닌 불편하고 불완전한 존재인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하나의 통일된 개체이면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완벽한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머니는 거울 속의 나를 “예쁘다”라고 말해주기까지 한다. 아기는 그렇게 거울에 비친 ‘예쁘고 완벽한 나’를 ‘나’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거울 단계를 통한 자아의 형성이다.


그림책에서 오른쪽의 실제 아이는 왼쪽 거울에 나타난 이미지를 보면서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둘이 신나게 놀다가 합쳐지는 장면은 둘의 동일시를 나타내고 아이가 거울 속 이미지를 통해 ‘자아’를 형성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인간이 거울 단계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려면 반드시 최초의 양육자인 어머니의 인정이 필요하다. 그림책에는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지만 이미 이야기 시작 전에 어머니의 인정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거울을 통한 자아 형성을 이만큼 잘 보여주는 그림책도 없다.


거울상을 ‘자아’로 받아들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림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경계 면을 기준으로 실존하는 아이와 거울 속 아이가 다시 나타난다. 재미있는 점은 그 둘이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두 면은 대칭이 아니다. 두 아이는 열심히 발레를 한다. 실제 존재하는 아이가 오른쪽에 있으니 왼쪽은 거울이다. 처음에는 두 아이의 움직임이 같았으나 서로 동작에 심취하다 보니 어느 순간 둘의 동작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거울의 상과 실존하는 내 몸이 완전히 일치될 수는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동작이 달라지면서 실존하는 아이가 거울을 따라 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조금 뒤 왼쪽의 거울 속 아이가 서로 동작이 맞지 않음을 눈치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 하지 않는 오른쪽 아이에게 화를 낸다. 왼쪽 아이, 거울상이 화를 내고 있다! 이를 통해 실존하는 아이보다 거울상이 상황을 더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왼쪽 아이가 오른쪽 아이를 밀어 버린다. 순간 오른쪽 아이가 있던 면이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넘어져 깨져버린다. 남아 있던 왼쪽 아이는 놀라 움츠린다. 그럴 줄 몰랐다는 듯이. 그리고 처음에 오른쪽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괴로운 표정으로 웅크려 앉는다.    


깨진 건 누구인가? 거울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던 오른쪽 아이였다! 언뜻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거울이 깨져야 할 것 같은데 실존하는 몸이 깨지다니? 이것은 소외를 상징한다. 거울상을 자아로 받아들이는 대신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몸으로 존재하는 실제의 내 모습이 소외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 그림책을 무서워한다. ‘나’라고 생각한 대상이 깨지는 경험은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공포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거울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통한 자아의 형성은 주체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실존하는 불완전한 몸(파편화되어있다고 느끼는)을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타자(여기서는 어머니)가 인정해준 완벽한 이미지를 '나'로 받아들였으나 실재적인 몸은 소외되었으니 순간 우울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가 ‘나’를 알아보는 것은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이미지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거울 단계는 필연적이다. 


 그림책 《거울속으로》의 뒤표지를 보면 아이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거울은 자신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다.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금지된 재현 La replica interdite>을 패러디한 것이다. 한 남자가 거울에 비친 자기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 말이다. 이 장면은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현존하는 것과 거울 속의 그것이 진짜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거울 속 이미지가 진짜 ‘나’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그림이라고나 할까?


거울에 비친 나를 사랑하는 것은 그곳의 ‘나’가 완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난 나는 혼자만 알고 있어선 안 된다. 누군가가 동의해 주고 칭찬해줄 때 ‘나’는 행복을 느낀다. 어머니가 늘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니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잘난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착한 일을 찾아서 하기도 한다. 때로는 잘난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야속하고 그래서 불행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모두 거울을 통해 자아를 형성했다. 그들도 다 잘난 사람들이고 모두 자신을 알아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서로 나만 알아달라고 아우성쳐서는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다. 인정받고 싶다면 상대방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나를 인정해 줄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모두 인정받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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