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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Feb 10. 2021

머리-가슴-배 사용법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의 라이프러리

전쟁 같은 한주였다. 데자뷔처럼 1년 전 이맘때의 일이 정확히 반복되었다. 일주일 사이에 3월과 4월의 모든 연주가 취소 혹은 연기되고, 가장 기대하던 파리에서의 레코딩 또한 가능하지 않을 듯 보였다. 모든 국경이 닫히고 북미 지역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는 유럽 연합의 국가들만 제외하고 위험지역이 아닌 국가에서의 여행까지 금지하는 것으로 국경 봉쇄 방침을 바꾸었다. 심지어 한국에 들어가 자가격리를 2주 마치고 다시 유럽으로 나가는 방법까지 고려하고 있었지만, 마지막엔 그것마저도 불가능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 상관으로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놀라는 마음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도 공연 취소 소식이 들려왔다. 9월에 예정된 연주였지만, 백신 공급이 예상만큼 원활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에서 해외 악단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오래 기다렸던 기회였고 큰 기대를 걸었던 연주였다. 연기도 아니고 그냥 취소라니,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사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다림에 지쳐버린 탓인지 그 절망감은 작년보다 깊었고, 나를 조금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지난 몇 주 어떻게든 녹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찾아보며 바쁘게 지냈던 터라 기운이 빠진 나는 이틀 정도를 멍하니 보냈다. 노력해도 안된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눈보라가 몰아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고치에 싸인 누에처럼 몸을 말아 앉았다. 


감정의 부침이 심한 나에겐 이런 힘 빠지는 상황이나 우울한 마음을 재부팅시키는 노하우가 있다. 

 

     1. 미소 궁둥이에 내 궁둥이를 붙여 앉는다. (*미소는 나의 반려견 이름이다)

     2.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일어난 일들에 대해 충분히 슬퍼한다. 

     3. 깊이 심호흡하며 머리와 마음을 완전히 비우려고 노력한다. 이때 스트레칭도 도움이 된다. 

     4. 일상의 리듬으로 몸을 움직인다. 가까이 닿아있는 일상을 계획해 본다.


이렇게 하다 보면 머릿속을 뒤흔들던 일들을 어느 정도 머리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 밀어내기 신공의 효과는 수일 지속되진 않지만, 단 며칠만이라도 과부하 된 머리에 휴식을 줄 수 있다. 이렇게 심신에 여유 공간을 마련해 놓고 차분히 당면한 문제를 하나씩 꺼내 정리한다. 어떨 때는 생각지 못했던 돌파구가 생기기도 하고, 포기할 수 있는 담대한 마음가짐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나처럼 꽤 예민한 성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어두운 마음이 닥쳐오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맡아 놓은 일도 끝내지 못했다.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견딜 수 없는 무거움으로 나를 더욱 짓눌렀다. 이런 시기가 찾아들면 마치 극심한 생리통을 겪는 것처럼 일주일 정도를 통째로 날렸다. 그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밖에는 들지 않아 컴퓨터와 TV만 멍하니 쳐다보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보낸 시간을 헛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 머리/가슴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 나만의 가이드를 써 내려가는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던 나를 기다려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기다림 덕분에 조금은 나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주말은 휴식했다. 목살을 구워 먹고(치-익), 다크 초콜릿도 먹었다(찹찹!). 매일 아침 커피와 함께 스트레칭을 했고, 미소의 온기를 느끼며 음악을 들었다. 컴퓨터는 최대한 켜지 않았다. 휴대폰도 무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연습도 설렁설렁했다. 일요일인 오늘은 쿠키를 구울 생각이다. 피칸이 들어간 쇼트브레드 쿠키인데, 밀가루보다 버터를 많이 넣어 부드러운 표면 위에 거친 설탕을 입힐 거다. 제자들에게 나누어 줄 만큼만 남겨놓고, 따뜻한 쿠키를 맘껏 맛보며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볼 거다. 영화가 흐르는 프로젝터의 은은한 불빛 사이로 밤이 지나가고 다시 아침이 오면 나는 머릿속에 꺼두었던 불들을 하나씩 켤 것이다. 긍정적인 마음과 여유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힘을 낼 것이다. 나는 내일을 기대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문자가 왔다. 프랑스로 들어갈 방법을 찾았다는데!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글쓴이 조진주 바이올리니스트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는 9살 강아지 미소의 집사. 낭만적 이성주의자이다. 발리에서 한달 살기를 꿈꾸는 등 자연과 함께 하는 힙스터의 삶을 상상하지만 연습/연주 때문에 실행하지 못한다. 쪼꼬렛과 커피, 그리고 일 벌이기 중독자이며 프랑스 소설을 사랑한다. 유난스러운 사람들과 재밌게 살다가 삶의 끝엔 현악 사중주를 연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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