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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Feb 24. 2021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의 라이프러리

가장 친한 친구가 지난달 아이를 낳았다. 정확히는 친구의 아내가 낳았다고 해야겠다. 이 녀석이 몇 달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던 페이스타임을 부쩍 자주 걸어온다. 사진과 영상을 받을 때마다 꼬물꼬물 귀여운 신생아가 신기하기도 하고 아직 철도 안 든 것 같은 친구가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기도 해서 묘한 감정이 든다. 일주일 만에 영상으로 인사한 아기는 부쩍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남의 애는 빨리 큰다는 어른들 말씀이 틀리지 않음을 실감하게 한다.


아직은 내게 출산과 양육이라는 단어는 외계의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무언가를 '기른다'는 일은 참으로 인간에게 만족스러운 일인 것 같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아본 부모들은 그렇게들 너도 빨리 낳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리라. 어떤 생명체가 나의 아웃풋을 받아들여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아마도 한 인간의 자존감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만 나도 '기르는' 일을 좋아한다. 내가 처음으로 양육의 의무를 지게 된 것은 소(반려견)가 우리 집에 오면서부터다. 나는 어릴 때 동물과 지내본 적이 없어 배울 것이 많았다. 밥을 언제, 얼마나,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산책과 배변 훈련은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건강과 행복을 어떻게 챙겨주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찾아보며 배웠다. 그 과정은 가끔 나를 당황하게 하고 고단하게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보다는 기쁨과 행복이 훨씬 컸다. 미소는 올해 말 열 살이 될 것이다. 강아지 나이로 치면 이제 노년기인 셈이다. 살아온 날들이 앞으로 살날보다 많아진 이 아이를 잘 돌보려면 앞으로도 나는 계속 배우고 성장해야 할 것이다.


'기른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양육의 의무가 느껴지는 일이다. 기악 담당교수는 그 특성상 학생들과의 관계가 각별하다. 특히 학부생들과 4년간 씨름하고 나면 그저 강의하는 관계에서 훨씬 더 나아간 특별한 사이가 된다. 아이들은 짧은 시간에도 많이 성장한다.


첫 연애를 하기도 하고, 이별하기도 한다. 수업 시간 내내 악기를 들지도 못한 채 내내 울다 나가기도 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을 하고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나가기도 한다. 아이들은 세상과 예술을 바라보는 폭과 깊이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그들이 영글어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다 보면 4년이 금방 지나가 버리기도 한다. 사실 아직 나도 철이 안 들었는데, 아이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이 가끔 버겁기도 하다. 그래도 아이들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처음으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이지 경이롭고 보람된 일이다.



최근에는 식물을 기르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죽이려 해도 죽일 수 없을 거라며 추천받았던, 늠름한 

두 개의 화분을 집에 들였다. 지금도 흙의 상태를 살피고 물을 주며 돌보고 있는데, 생애 처음으로 일 년 이상 살.아.있.다!!! 이 식물들에 너무 감사한 나머지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초등학생도 기를 수 있다는 다육이를 데려와도 한 달을 못 버텼으니, 이 식물들의 생존은 내게 대단한 감동이다. 햇빛이 잘 드는 집에 살게 되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여러 양육의 경험을 거쳐 실력이 향상된 것일 수도 있다. '적당한' 양이 얼만큼인지에 대한 직감이 확실히 예전보다는 날카로워졌다는 생각이 든다.(지금까지 내 곁에서 희생당한 식물들에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사실 내가 가장 오랫동안 길러 온 것은 '내 안의 음악가'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이 아이를 양육해왔다. 좋은 것이라면 다 챙겨주며 그 크기와 깊이를 키운 것이다. '인간 조진주'가 할 수는 일이라도 '음악가 조진주'를 위해서라면 숨어있던 괴력이 발휘되기도 하고, 노력과 희생을 자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가 조진주' 덕분에 '인간 조진주'가 선물 받은 순간도 많다. 세계의 곳곳에서 흔히 할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을 하며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삶의 모습을 꾸릴 수 있는 원동력도 '음악가 조진주'가 내어준 것이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기르며 살게 될까. 스스로 묻는다. 내가 어떤 것에 시간과 정성, 애정을 쏟는지가 결국 내 인생의 방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기르기 위해 꼭 필요한 두 가지는 사랑과 기다림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고, 지금 겪는 변화를 바라보며 충분히 지지해줄 수 있다면 내 안의 나를 더 제대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올해에는 조금 더 내 안의 나를 소중히 아끼고 '기를' 수 있기를 바란다. 충분한 사랑으로, 재촉하지 않는 믿음과 기다림으로, 더불어 많은 격려와 칭찬도 아끼지 않으면서 말이다. 



글쓴이 조진주 바이올리니스트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는 9살 강아지 미소의 집사. 낭만적 이성주의자이다. 발리에서 한 달 살기를 꿈꾸는 등 자연과 함께 하는 힙스터의 삶을 상상하지만 연습/연주 때문에 실행하지 못한다. 쪼꼬렛과 커피, 그리고 일 벌이기 중독자이며 프랑스 소설을 사랑한다. 유난스러운 사람들과 재밌게 살다가 삶의 끝엔 현악 사중주를 연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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