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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알아차릴 수 있던 돌싱의 징후

돌싱이라는걸 듣고나서야 알아차린 그 남자의 특징

by 한눈팔기

그랬다.

3주간의 썸 같은 기간에 나는 세상 순진하게도 그 남자가 돌싱일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디 가도 명함 내밀 수 있을 정도의 스펙을 갖춘 나는 늘 소개팅을 통해 이성을 만나왔었고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 40을 바라본다 한들 그 누구도 내게 돌싱남을 소개해주진 않아왔었다.


그런 내가 대학교 졸업 이후 최초로 자만추로 만나게 된 남자가 하필 돌싱남이었을 줄은...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돌싱남이라는 고백을 해주었기에 그나마 살려는 드렸다고 해야 하나.

연애를 하기로 서로 합의를 보고 나를 헤어나오지 못하게 가둬 둔 다음 고백한 거였다면 멱살을 잡았을거다.

그렇지만 별 큰 차이도 없다. 이미 난 그와 택시 두번 같이 타고 맥주 두번 마시고 카톡 2주간 하면서

어푸어푸 첨벙첨벙 그 매력에 끌려들어가고 있었으니까 뭐.


지난번 작성한 브런치 글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건데,

돌밍아웃을 하기 1주전에 단둘의 맥주타임이 먼저 있었다.

(돌밍아웃날이 첫 둘만의 맥주데이트가 아니었다는 뜻)


동호회 뒤풀이 후 같이 택시를 타고 오다가 내가 양산을 흘리고 내려서 그걸 돌려받으러 만난 날이 최초의 둘만의 데이트였었다.

정말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건가.

내가 먼저 택시에서 내리며 조그만 양산을 떨어뜨렸고, 나를 데려다주고 나중에 가던 오빤 그걸 택시에서 내리며 발견, 주워서 사진을 찍어 나에게 카톡을 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언제 받으러 갈까 고민을 하다가, 이미 이때부터 부정맥 증상이 너무 심했기에

도저히 더 기다리지 못하고 큰 마음을 먹고 이틀만에 먼저 연락을 했었다.

(비록 집에 비슷한 양산이 수십개는 있지만 난 그 양산이 꼭 필요했다고 애교섞인 말을 했던게 잘못이었을까. 오빠는 내가 양산을 일부러 떨어뜨린거라고 6개월이 넘은 아직까지 굳게 믿고 있다.)


"저 요즘 날이 너무 뜨거워서 그 양산이 꼭 필요한데 내일 제가 받으러 갈 수 있을까요?"

"내일은 제가 여행을 가서 그런데, 서희(이제부터 나를 호칭하는 이름, 가명)님이 오늘 받으러 와주시면 안될까요?"


야근을 하던 중 갑작스레 달려가 만난 그 남자 기주(이제부터 오빠를 지칭하는 이름, 가명)는 내 예상대로 맥주 한잔을 권했고

그렇게 5시간 가량을 수다를 떨면서 취하도록 맥주를 마셨었다.


이 날 내가 느낀 감정은

1. 이상하다. 이렇게 잘 생긴 남자가 데이트 코스같은걸 잘 모르네? 이렇게 잘 생긴 남자가 연애 경험이 많지 않은것 같은데 무슨 일일까?

2. 여행을 다녀본적이 거의 없는거 같네? 이 정도 나이의 남자라면 연애하면서 여행을 다녔을 법도 한데..


이런 이유들로 살짝 실망 아닌 실망도 했었다.

세련되게 데이트 코스를 짜 분위기 잡고 좋은 곳을 데려가는 낭만 있는 데이트를 꿈꾸는 허세가득한 나였으니까.

그래도 대화가 너무 즐거웠었고, 너무 잘 통했으며

무엇보다 잘생긴 외모에 이끌려 부정맥의 증상은 호전되기는 커녕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 외에도 조금 특별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1. 카톡을 할때에는 너무 다정하게 항상 존댓말을 해줬다.

2. 카톡 답장도 재빠르고 엄청 성의 있었다.

3. 내가 하는 말을 작은 것 하나까지 귀담아듣고 기억했다가 꼭 그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봐줬다.

4. 약속을 허투로 여기지 않았고 매 상황을 미리미리 알려주었다.

5. 이건 100프로 아이가 있다는 증거였음에도 내가 미처 몰랐던건데.
그 남자는 항상 대형 물티슈를 들고 다녔다. ㅠ 난 땀이 많이 나서 닦으려고 가지고 다니는줄만 알았고...


돌밍아웃 이후 곰곰 생각해보니, 10년 전 결혼 후 혼전임신으로 바로 아이를 낳아 지지고 볶고 사느라,

즉 30대 초반의 연애가 마지막이었기에, 데이트에 대한 경험이 없었고 그래서 흔해빠진 데이트코스조차도 알지 못했던거다.

30대-40대 남자들이 흔히하는 밀당을 해보기도 전에 결혼을 했기에 무조건 직진밖에 할줄 몰랐던거다.

애 낳고 키우며 바쁘게 사느라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던 거였다.

여자아이를 키우며 다정한 말투가 입에 배여서 나에게도 "우리 서희, 우리 서희"가 자동적으로 나온거였다.

그랬다. 아이를 키우며 챙기고 케어하며 생긴 버릇들이 나를 사로잡아 버린거였다.

무뚝뚝하기로는 대한민국 1등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가 이런 다정함과 자상함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물론 기주오빠가 가진 기본 성향 자체가 언제나 진심을 다하고 솔직하고 가식과 허세가 없기에,

그랬기에 자석에 이끌리듯 내가 딸려갔던거겠지만.

내 마음에 남아 "저렇게 잘 생겼는데 왜 그럴까" 고민하게 만들었던,

평범한 남자들과 달랐던 점들은 그의 10년간의 결혼과 아이가 남긴 깊은 흔적이었던거다.

"어렸을때 우리 아빠가 기주오빠 같았더라면 나는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텐데" 하고

매일매일 생각하게 만드는거다.

가끔은 오빠의 열살짜리 아이가 부럽다는, 어처구니 없는 마음에 얼굴을 붉히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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