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뭐해.
한달 쯤 전의 일이다.
기주오빠와의 통화 너머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
"아빠는 뭐하는데"
귀여운 10살짜리 여자아이의 평범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실체,
오빠의 딸의 실체를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오빠와 나의 평상시 생활 루틴은 이렇다.
올해 나는 직장인이 아닌 대학원생이다。
그래서 평일에는 오빠의 출근길, 퇴근길 집까지 걸어가는 40분간 하루도 빠짐없이 통화를 한다.
일과 중에는 어쩌다 점심 잘 먹으라는 카톡을 보내거나 우스운 카톡을 주고 받기도 한다.
다만, 오빠의 업무가 꽤 집중을 요하는 분야이다 보니, 되도록이면 방해를 하지 않으려 카톡을 보내지 않으려 한다.
더구나 오빠의 직장 사람들은 오빠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오빠가 확실히 이혼한게 맞는지 의심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오빠의 직장은 자그마한 회사에 친한 형과 같이 하고 있는 일이다보니, 까다롭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사장님이 친한 형인데도 불구하고, 동종 업계 사람들에게 이혼 사실이 알려지는게 껄끄럽다고 오빠는 설명한 적 있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일과 중 오빠에게 하는 연락을 되도록 자제하고 있다.
또한 오빠가 퇴근 후 집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나는 연락을 하지 않는다.
아빠가 어떤 누군가와 다정하게 카톡을 주고 받거나 통화를 하는 모습은 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테니까.
사실 연애 초반에는 오빠가 집에 들어간 뒤에도 종종 카톡을 주고 받기도 했으나,
그 때에도 밤 9시가 넘은 뒤에 내가 보낸 카톡은 다음 날 오전에 읽는 것 같았기에
어느 순간부터 나도 퇴근 후에는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때로는 재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숙제를 봐주기도 하는 오빠의 저녁 일정을 대충 알기에
오빠의 퇴근 길 통화에서
오늘 하루 수고했다、 이따가 밤에 일찍 잘자라는 인사까지 미리 모두 마친 뒤
궁금하거나 답답해하지 않고 나름의 생활을 하며 다음날 아침 오빠와의 통화를 기다리면서 잠든다.
그러던 어느날 오빠가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기 위해 재희가 옆에 있는데도 내게 전화를 건거다.
평상시와는 달리 사무적인 태도로 무뚝뚝하게 통화를 하는 오빠의 목소리가 너무 낯설었지만,
그래도 오빠 사정 아는 나니까
이해 한 채로 열심히 대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의 상황이 실제 어떨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갑자기 내 말을 끊고 오빠가 전화기 너머로 말을 했다.
"아빠가 빨리 씻고 오라고 했잖아. 얼른 가서 샤워해"
"아빠는 뭐하는데"
..정 적..
순간의 그 느낌을 어떻게 기록하면 좋을까.
단순히 목소리일 뿐인데. 왜 그렇게 선명했을까.
그 아이의 존재가.
이런거구나. 아이랑 같이 산다는 건.
그동안 그냥 얘기로만 듣던 오빠의 일상.
그 일상 속에 “정말” 존재하는 아이.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로 "아빠" 라고 불린 오빠.
아빠구나 정말.
가끔 나와 같이 있을때 아이랑 통화하는걸 옆에서 듣기도 했지만,
전화기 너머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는 들은적이 없어서 였을까.
아이와 주고받는 그 대화들 앞에서 나는, 순간 숨이 탁 막혀왔다.
그러고는 또 다시 내 주특기인 “못들은척”을 시전했다.
그날 밤 오빠와 통화를 마치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토록 피하고 싶은 존재의 실체를 느껴버린 감정은 그다지 좋을 리 없었다.
그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게 어서 빨리 누워
깊은 잠에 들어버리고 싶었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그동안 나는 믿고 싶지 않았던걸까. 애써 외면하며 알지 않으려 하며 믿지 않으려 했던걸까.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는걸 왜 나는 상상조차 하지 않은걸까.
엄연히 오빠 옆에 존재하고 있는 아이의 실체를 귀로 가장 먼저 느낀 그날밤의 기분이 생생하다.
모습으로, 형태로, 눈으로 그 실체를 마주하는 건 더더구나 쉽지 않은 일이겠구나.
하고 멍하게 앉아 있었던 그 밤의 내 표정도 그려질 듯 하다.
그치만
오빠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목소리를 들어버린 그날밤의 막막했던 마음은
아무래도 글로 잘 써지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