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실체 2. 죄책감으로 전락해버린 행복

미안하다고 차마 말 하지는 않았지만.

by 한눈팔기

"재희 키움센터 신청을 깜빡했어. 신청기간이 오늘 낮에 끝났는데. 아씨.. 어떡하지.

엄마한테 무지하게 욕먹었네."

어느날 저녁 퇴근 시간 오빠의 통화에서, 오빠는 너무 낯선 목소리를 들려줬다.

언제나 다정하게 아기한테 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 오빠였는데,

그날은 기분이 나쁘고 속상한 그 감정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 같은 오빠의 목소리는 처음이었고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키움센터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게 뭐냐고 되물었고

방과 후 두어시간 아이를 돌봐주는 동네 센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재희 학교가 파하면, 오빠의 어머니가 재희를 봐줄 수 있는 시간 전까지 센터에 아이를 맡겨두었다고 한다.


"그럼 어떡해?"

나는 초등학생이 방과후에 무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기에 대안을 말해줄수도 없었고 답답했다.

그 시기 거의 2-3일간을 오빠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같이 지냈었는데,

나는 일이 이지경이 된 게 내 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정신 못차리고 같이 있다보니 애가 어떻게 되는지 신경도 못썼구나,

오빠도 후회하고 있구나, 그래서 이렇게 짜증이 났구나.

그런 생각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빠를 하루쯤은 집에 보냈어야 했나, 오빠에게 뭐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내가 체크를 했어야 했나.

미안한 일이 아닌데 나도 모르게 '어떡하지 미안해서'라는 심정이 들었다.


어쩌면 그동안 이런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거였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도움은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부모인 아빠가 앞뒤없이 연애를 하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한번쯤은 일어날 일이었을 거다.

제대로 챙기지 못해 벌어질, 아이 문제.


머리속도 복잡하고 어떻게 해야되는건지 모른다는 오빠에게 뭐라도 도움되고 싶어서

맘카페를 검색해서 이말 저말 아무말이나 던졌다.

"학교에서 방과후에 돌봐주는 프로그램 있다는데?"

"학교 방과후 돌봄교실도 이미 신청인원 초과라서 안된대"

"지역아동센터도 있다는데 그거 신청하면 되겠는데?"

"지역아동센터에 갔다가 안좋은 친구들 사귈까봐 안보내고 싶어"

"그럼 학원을 추가로 보내야 하는거야?"

"아 모르겠어. 모르겠네"

"학교에 연락해서 돌봄교실 추가로 받아달라고 말해보면 안돼?"

"그래야 할 수도 있고.. 아.......................미치겠네"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오빠라서 이렇게나 멘탈이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렇게2-3일간 우리의 통화 속 대화는 한번도 그래본적 없던, 낮게 깔리고 한숨이 섞인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나도 함부로 웃지 못했고, 가벼운 농담도 건넬 수 없었다.

원래 우리의 통화의 절반 이상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였는데, 그 시기 우리는 길게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3일 정도가 지난 뒤, 나에게 짜증을 냈던게 미안해서였을까.

오빠는 일을 어떻게 해결을 했는지 나에게 설명은 따로 해주지 않았고 원래의 장난끼 많은 목소리로 돌아왔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보아하니 추가적으로 학원을 더 보내게 된 것 같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어서 멀찌감치 서서 불난집 불구경하듯 있었던 그 상황.

전혀 도움되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

그 상황과 감정들은 나를 너무 불안하게 했다.

우리가 함께 보냈던 너무 좋았던 며칠을 오빠는 이제 와서 원망하고 있을까봐 걱정됐다.

오빠가 이제 더는 나와 오래 같이 있지 않겠다고, 재희와 더 오래 있어야 겠다고 선언할까봐 두려웠다.

우리 둘만 좋다고 덮어놓고 즐거워할일이 아니구나, 라는 각성은

무작정 행복하기만 하니까 되었다고 뛰어 든 내 이 연애의 본질을 뒤흔드는 대사건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우리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인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

우리의 관계를 언제든지 끊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유일한 "존재"

나는 언제나 그보다 앞선 곳에 설 수 없다는 것.

내 행복이라는 건,

그 "존재"의 상태에 따라 순식간에 내던져지고 가치 없어지고 죄책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진실의 실체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