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여사친에 대한 이야기
"지은이라는 여사친이 있는데, 어느날 수영장이 갖춰진 호텔 숙박권이 생겼다면서
나랑 재희(지금부터 오빠의 아이 이름, 가명) 랑 같이 가자는거야.
그렇게 지은이랑 1박 2일 같이 있었는데 재희랑 너무 잘 놀아주고 챙겨주더라고. 너무 고맙더라. 그때 지은이가 너무 예뻐보이더라."
호텔 숙박권 얘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지은이라는 여사친이
기주오빠의 딸아이와 하루정도 같이 놀아준 일이 있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빠가 지은이를 혼자 좋아했었다는것도 어느정도 눈치채고는 있었다.
재희랑 하루 놀아주었다는 얘기만 들었을 때 나는,
지은이는 정말 오빠를 친구로 생각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친한 돌싱 남사친이 아이가있다면, 그 애를 어쩌다가 만날수는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남자, 내가 사귀고 있는 남자의 아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나?
나보다 더 성격좋고 거침없는 성격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본인이 사귀는 남자가 애딸린 돌싱남이라면,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 아이를 만나고 싶지는 않을거라고들 했다.
친구들은 나에게,
"혹시나 설마 네 남자친구가
너에게 애를 만나보길 원한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남자의 이기적인 생각인거지~
절대 착한 마음에 그 아이를 어쩔수 없이 만나고 그러지 마"
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나 역시 최대한 만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현실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수영장 딸린 호텔 숙박권을 쓰며 이틀을 온전히 아이와 놀아준 지은이의 마음은 내 예상과는 다른 마음이었나보다. 둘은 정말 어떤 사이였을까 ?
어찌됐든 오빠와 연이 되지 않은걸 보면 지은이라는 여자도 재희와의 만남 이후
아이가 있는 돌싱남과의 만남은 어렵겠다는걸 직감했고 그래서 멀어졌을지도.. 그런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본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서 물어보지 않았기에 어떤 이유로 지은이와 오빠가 이어지지 않게 된건지는 파편적으로 짐작만 할뿐이다.
오빠와 사귀게 된 뒤로 지금까지 나는 많은 순간 재희 얘기가 나올때마다 화제를 돌려버렸다.
우리가 헤어지게 될 이유가 있다면 어쩌면 바로 그 아이일텐데.
자꾸만 헤어짐을 생각 하게 만드는 그 이름을 듣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내 마음이 정말 나쁘고 이기적인걸까.
오빠에게는 삶이자 일부인데, 나는 왜 그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외면하고만 싶을까.
몇시간이고 내 고양이에 대해서는 수다를 떨어대면서도
나는 이기적이게도 기주오빠의 아이 얘기가 나오면
"아 그렇구나, 아 그랬어??"하고 흘려넘긴다. 듣기 거북해서 제대로 못들은척 하기도 했다.
이런 나에게 오빠는 매일매일 실망하고 있겠지. 지은이라는 여사친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겠지.
차라리 지은이를 만났더라면, 재희의 좋은 친구같은, 어쩌면 먼 미래에는 새엄마 역할을 해줄수도 있었을텐데,
아이와 함께하는 데이트를 하면서 편안하고 안정적이었을테 라면서 아쉬워하고 있을거야.
왜 서희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아이를 보고싶어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을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쩔때는 불안하기도 하고
내가 재희문제로 어떻게 더 잘 보여야 할까 안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단지 그렇다고 해서 나를 물리치고,
나를 힘들게 할수는 없다는 생각이 더 크다.
잘 보이고 싶어서 내 마음을 다치게 할 수는 없어.
아이가 있는 남자와의 연애.
영원히 내가 그에게는 1순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끝도 없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데이트를 하는 도중에도 아이에게 일이 생기면 달려가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한 게 아니다.
최대한 나와 많이 만나기 위해 무던하게 노력하고 있는 오빠라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싱글남이랑 사귀었어도 오빠만큼이나 자주 오래 만나지는 못했을거라는걸 알면서도,
그래도 아이를 돌보는 문제로 약속시간이 딜레이 될 때에는 나도 모르게 울컥울컥하다.
재희와의 일정이 있는 날, 일정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오빠가 이제 나에게 오고 있다는 전화를 걸어오면,
소리없이 눈물이 나왔던 때가 몇번 있다.
그 눈물의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
하루종일 기다린 것도 아니었고, 혼자 내 할 일 하면서 잘 지내고 있었는데 밤늦게 나오라는 그 전화를 받을때 나는,
비오는날 오래도록 기다렸던 엄마가 늦도록 오지 않아 교실에 혼자 남아있다가
세상에서 제일 커다랗고 예쁜 우산을 가지고
나를 보러 온 엄마를 보고 뛰어나가는 아이같은 기분이 든다.
나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다른 여자들보다 민감하거나 예민하지 않다.
싸우는 것도, 내 주장을 펼치는 것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애초에 싸움을 걸거나 만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은이라는 여사친이 참 예뻐보이고 고마웠다고 말하는걸 듣고 나서도 아무말 하지 못했다.
뒤늦게 그때 화를 내볼걸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오빠가 처음으로 내앞에서 선 넘어버린 말을 했단걸 직감했는데도,
이런 말을 할 오빠가 아니란걸 아는데 이런 말을 했을때에는 나에게 바라는 많은 것들을 채우지 못해서 터져나와버린 말이란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말 할 수 없었다.
자식이 있는 남자와의 연애는
알고 싶은 수많은 말들을 마음 속 창고 안에 쑤셔박고 꽁꽁 걸어잠거버린 채 도망치는 심정의 하루하루이다.
물어보고 싶은것도, 왜 이래야만 하는지도 꼬치꼬치 따져묻고 싶어도.
하는 수 없다. 아이 문제잖아. 내가 듣기 싫어하는 그 문제. 쉽게 말할수 없는 그 문제.
끝내, 만나고 싶지 않아.
그 아이의 존재자체로 느끼게 될까봐.
그 아이를 낳고 행복했을 하루, 조마조마했을 하루, 어찌할 줄 몰라 안달복달했을 하루,
가슴찢어졌을 하루, 기쁨에 흘러넘쳤을 하루, 그런 마음들이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전부, 와락 느껴질것만 같다.
이런 마음들을 다 느껴봤을 사람이 오빠라니..
나는 전혀 알 수 없는 그마음을 가지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라니..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언제까지, 어디까지 같이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너진다.
아이를 안고 그 많은 날들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했다는 사실은,
둘만의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랬을 그 하루들은 나와는 영원히 만들수 없는 하루들이라는 사실은,
그냥 이 사람은 저만큼 먼 반대편 차선에서 지나가는 행인인것 같은
멀고 먼 기분을 들게 한다.
언제, 어디에서 우리는 서로를 놓아주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