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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건 결국.

오빠를 두고 소개팅 다녀오다.

by 한눈팔기

연휴에 오빠와 오빠 친구들과 캠핑을 하고 왔다.

캠핑을 같이 한 친한 동생들은 기주오빠와 테니스 동호회를 통해 오랫동안 알던 사람들이다.

작년 겨울 오빠가 그들을 소개해주며 술 한잔을 한적이 있었던지라 안면은 튼 적이 있었다.

오빠와 나 단둘만 지내는 시간이 아닌 다른 사람들 속의 오빠를 보면서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실은, 나중에 오빠가 이 글들을 볼까봐 너무너무 망설여지나, 그래도 적긴 해야겠다.

캠핑 다녀온 다음날 소개팅이 잡혀 있었다.

최근 회사 밖의 생활을 하며 알고 지내게 된 분이 있는데,

대화를 서로 많이 나눈 것은 아니어서

내가 미혼이라는 것만 알고 연애 중이라는 것은 모르는 분이다.

어느날, 연애를 오랫동안 하지 않고 있는

대학후배 녀석이 있는데,

서희씨랑 딱 4살 차이이고 조건이 너무 좋으니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하시는거다.

순간 너무 당황했는데 그 자리에서 남자친구가 있다는 고백을 미처 하지 못했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했더라도 소개팅이 들어왔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터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가 기주오빠와 연애중이라는걸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소개팅 제안이 들어온 이 당시에는

오빠의 상황에 대한 자신 없는 마음들,

오빠에게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끝없는 망상과 분노,

전에는 한 적 없던 부모님에 대한 걱정까지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나를 갉아먹고 있던 중이었기에.

"까짓거, 나도 몰라,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오빠때문에 나도 이렇게 힘든데 뭐"

라는 마음으로 소개팅을 나가 보겠다고 대답을 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속에서 오빠와 붙어있던 이틀간의 캠핑은

내 마음을 다시 원래 자리로, 오빠 옆으로 확고하게 되앉혀 둘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이유를 여기에 하나하나 낱낱이 적어보며

남자친구를 두고 소개팅을 마다하지 못한

내 어리석었던 마음을 호되게 꾸짖어보려한다.

내가 오빠를 사랑하는 이유를,

오빠여야만 하는 이유를,

절대 잊지 않도록 여기에 꾹꾹 눌러적어보려한다.


1)

오빠와 친구들은 캠핑장 가까이에 있는 테니스장에

민폐수준의 테니스 초보인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내가 그 어떤 말도 안되는 플레이를 하더라도 참아주었다.

너무 부끄럽고 민망스러웠으나,

오빠는 내가 기죽지 않게 계속해서 나를 웃겨주며 잘한다고 칭찬해주었다.

'아, 나였더라면, 다른 누구였더라도 분명 적어도 한번쯤은 짜증을 냈을텐데'

하는 생각에 오빠에 대한 든든한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도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내일 모레 있을 소개팅에 나올,

스펙도 조건도 좋은 그 남자에게

엄청난 하자가 있길 빌고 또 빌었다.


2)

같이 테니스를 친 오빠 친구의 여자친구는

오빠가 열심히 테니스를 치는 중간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언니, 기주오빠 말이에요,

언니를 만난 뒤로 얼굴이 완전 환해졌어요.

인상도 훨씬 좋아지고 딱 안정된 느낌이 들어서 신기하다고 우리끼리 얘기한다니까요.

남자도 연애를 하면

저렇게 달라지는구나 그생각했잖아요"

연애 한 뒤 얼굴이 피고 인상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고 있는 나인데,

오빠도 남들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게 너무 좋았다.

오빠가 나로 인해 행복해졌구나,

그게 나를 더 행복하게 했다.


3)

솔직히 오빠는 내가 만난 그 어떤 남자보다

성격이 좋다.

처음 나는 오빠의 외모에 반했지만,

성격에 더 많이 반했던것 같다.

늘 긍정적이고 장난끼 가득한 성격.

캠핑장에서 고기를 굽던 오빠의 친구가 내게 물었다.

"기주형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잘생겼잖아요~"

다들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치만 긍정적인 성격이 더 좋았어요"

그러자 친구들도 한마디씩 보탠다.

"맞아, 형은 항상 좋은 말만 해. 무조건 칭찬만 해주고, 나쁜 말 하는거 들어본 적이 없어"

기주오빠는 또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없는 소리는 못해. 네가 칭찬받을 짓을 하니깐 한거지 나는 없는 소리 절대 안해"

내가 오빨 이렇게나 많이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


4)

우리는 밤늦게 모닥불을 피워놓고

삼겹살에 라면에 끊임없이 안주를 만들어가며

술을 마셨는데,

밤 12시가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나혼자 먼저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잠에 들었다가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어 새벽 3시쯤 뒤척이며

잠에서 깨었다.

그 시간까지 오빠와 한 친구는 내가 잠들어 있는

텐트 가까이에서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친구는 정말 훌륭한 인터뷰어였는데,

오빠에게 여자친구의 어떤 점이 좋은지,

둘은 어떻게 만났는지 등등을

잘근잘근 끊임없이 물어보는 중이었던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귀를 쫑긋대며

최대한 자세히 들어보려 애썼으나

"진짜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이 있나 싶다니깐?"

"나한테 너무 고마운 사람이야"

라는 기주오빠의 답변 외에 더 자세한 대답은 뭐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과 졸음에 얼큰히 취해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래서 무지하게 속상하다.

얘기를 계속 들으려고 화장실도 못가고 계속 참았는데 왜 디테일한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지...

텐트가 오빠와 친구가 앉아있던 자리와

좀더 가까이에 쳐져 있었다면

모든말들이 더 잘 들렸을텐데

그점도 너무 아쉬울뿐이다.


허나, 친구의 물음에 신나고 들떠서 대답하는 기주오빠의 텐션과 목소리는

졸린 내 입가에 웃음을 가득 터뜨려주고도 남았다.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행복에 겨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오빠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과정을 줄줄 읊어대고

오빠의 어디가 좋은지,

어떤 점이 우리는 정말 잘 맞는지

속사포랩처럼 떠들어대던 나였는데

지금 오빠가 밖에서 나와 똑같이 그러고 있는거다.

만난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렇게 들뜬 목소리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아마도 재희는 예외겠지만)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오빠인데

저런 질문에 신나서 행복에 취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다는게.

오빠가 내게 보여주는 완벽하고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사랑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다음날 오빠한테 무슨 얘길 그렇게 밤새 했냐고 물으니

"우리가 어떻게 만났냐고 묻길래 말해줬지.

서희가 양산 두고 내린 양산 사건..ㅋㅋㅋㅋㅋㅋ"



일요일, 오빠에게는 부산에서 오랜만에 서울 올라온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소개팅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오빠는 약속장소까지 나를 데려다주겠다는 말로 나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약속장소가 멀다고 속여 오빠를 집에 있게 하고,

정작 나는 우리집 가까이에서 소개팅을 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내 바람대로 내 스타일이 전혀 아닌 분이 나오셨기 때문이다.

정말정말 미안하다. 소개팅을 제안해주신 분과 아무것도 모르고 나오신 분에게.

내가 내년 1년간 미국을 간다는걸 모르고 나오신 분이었어서, 그 점을 강조하며 얘기했더니

이분도 많이 당황하고 놀라신 것 같다.

연애와 결혼 얘기로 대화 주제가 옮겨지면

애써서 파스타 맛이 어떻네, 이 집 분위기가 어떻네,

딴 소리를 하다가 내일 새벽부터 일정이 있어서 이만 들어가야겠다고 하고 서둘러 헤어졌다.


다시는 오빠에게 이런 못된 짓 하지 않을거다.

소개팅 내내 오빠에게 연락이 올까봐 조마조마했다.

얼른 마무리를 하고 오빠를 만나러 가야해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소개팅이 끝나자마자 달려가 만난 오빠.

멀리서 나한테 걸어오는 오빠 모습을 보니깐

진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온건지 눈물이 핑 돌았다.

따뜻한 오빠 손을 잡고 나니,

지금 나한테 뭐가 필요한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한결같이 나에게 사랑의 마음을 다 보여주는 사람.

이 사람을 놓치면 나는 평생 후회할거라는걸 확실히 알았다.

오빠와 오빠를 사랑하는 내 자신에게 홀려 정신없이 빠져들던 오래전 어느날 했던 생각처럼.

"오빠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되더라도.

그 곁에 재희가 있다 해도, 난 할 수 있을 것 같아.

누군가 나를 막고 그 미래로 절대 가지 못하게 막는다 해도 다 밀쳐내고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아.

오빠가 없으면 나는 절대로,

제대로 살지 못할 것 같으니까."

이 마음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환한 낮이 발갛게 저녁으로 물들어 가던 시간.

그 하늘 아래.

큰 길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오빠 어딨어? 안 보이는데"

통화를 하다가 발견한 오빠.

전화기를 든 채로 서로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 우리 둘.

저 멀리서 까만 모자 까만 티셔츠 까만 바지를 입고

뚜벅뚜벅

나에게로 걸어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잘 갔다왔어?"

손을 잡아주는.

오빠가 없으면

나는 절대로

살아낼수가 없을 것 같아.

그래서. 꼭. 나는 가보고 싶어.

오빠와 함께 있을 먼 미래.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손잡고 있을 어떤 미래.


내 평생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생겨버렸어.

소개팅을 하고 돌아온 거라는거.

상상도 할 수 없을 오빠가

내 손을 잡아주러 걸어오던 모습.

나는 그 일요일의,

그 장면을 절대로 죽을때까지 못잊을 거 같아.

미안해 오빠. 속여서.

너무너무 미안해..

다시는, 절대 다시는 안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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