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말아줘.
지지난번 글, " 일부러 나란히 길잃은 두 사람"을 작성했을때를 기억한다.
그 글을 작성하기 불과 며칠전이었던 5월의 마지막주에,
나는 오빠에게 이렇게 얘기했었다.
"오빠의 전처에게서 오는 전화가 싫어.
그리고 계속 들을 수 밖에 없는 얘기지만, 재희 얘기가 나에게는 너무 불편한 일이야.
내가 영원히 오빠에게 1순위가 될 수 없는게 너무 속상하다구."
술을 마신 뒤 많이 졸려하던 오빠는 이 이야기들을 듣더니
졸음이 싹 달아난 듯 내 얘기를 다 들어주고,
언젠가는 서희 네가 1순위가 되는 그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해줬었다.
그 대답을 들은 나는 오빠에 대한 믿음을 조금 더 키울 수 있었던 반면,
오빠는 아니었을 거라는걸,
시간이 조금 지난 뒤, 그제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
이 대화를 나누기 전,
우리의 대화 주제는 "우리가 함께 할 미래"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었는데.
이 대화를 나눈 뒤로 오빠는 늘
"서희의 미래" 그리고 "오빠의 미래"를 분리해서 말하곤 한다.
그렇게 바뀐 오빠를 느낀 순간.
5월의 마지막 날 공원에서 내가 오빠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했었구나라는걸
등골 서늘하게 직감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오빤 나와 저녁을 먹으며 그 주제를 다시 꺼냈다.
"서희야. 재희는 서희 경쟁상대가 아니야.
그냥 어린 애잖아.
1순위, 2순위 그런 대상이 아니잖아. 서희가 재희랑은 다른 존재라는걸 좀 알았으면 좋겠어.
오빠는 서희한테 정말 많이 노력하고 있는데.."
"아니, 오빠, 경쟁상대라고 생각해서 한말 아냐.
오빠에게는 따로 '가족'이 있는거고, 나는 아니잖아.
그러니까 난 영원히, 당연히 1순위가 될 수 없다는거, 그걸 말한거야."
내가 추호도 10살짜리 아이를 경쟁상대로 느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쟁상대'라는 표현이 과해서 그렇지, 내가 느꼈던 감정은 어쩌면
질투와 비슷하면서도 질투와는 결이 다른, 어떤 무엇이었으니까.
나는 내 감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오빠의 행복했던 결혼 생활, 그 속에서 태어난 아이.
난 그걸 받아들이는게 정말 쉽지 않다는걸 이해시키고 싶었는데...
그렇게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더 나아가지 못한 채로 끝나버렸다.
그날 했던 우리의 데이트는 끝까지 행복했지만.
다음 날 눈을 뜨고는,
'오빠가 그동안 여러모로 내 말을 곱씹었구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를 다시 생각해봤겠구나,
1년이 다 된 시점에서도 재희에 대한 마음을 열지 않은 채
노력이란 것도 해볼 마음 없어보이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실망이 대단했겠구나.
그래서 더는 나와의 미래를 꿈꾸지 않게 된건가보다.
오빠에게 재희를 예뻐해줄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나와의 행복했던 날들도 사랑했던 마음도 순식간에 식어버릴 수있겠구나.'
그런 생각들로 괴로웠다.
그래서 어제는 나의 인생선배같은 분에게 내 최근의 사정들과 속내를 다 털어놓았다.
오래 알고 지낸 분은 아니어도, 한두번의 대화속에서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울리는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었기에
지금의 내 불안한 감정을 낱낱이 내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분과의 대화 속에서
뼈를 얻어맞는 심정으로, 내가 내뱉었던 말들이
오빠의 입장에서 얼마나 가혹했던 것이었는지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오빠에게 내뱉었던 "재희의 말을 듣는게 불편하다"라는 이 말,
오빠에게는 오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었을 거라는 거.
오빠가 보여주는 사랑의 확신 속에서
오빠는 나를 영원히 사랑할거라고 오만하게도 철썩같이 믿고 있는 까닭에
해서는 안될 말을 했던 거라는거....
재희는 오빠에게는 절대 따로 떼어 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에,
오빠를 만나오고 있다는것 자체가
그 아이까지 받아들인단 것이 어쩌면 전제조건인거고
그 자체를 1년이 지나도록 받아들일 기미 없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거라는거.
우리의 관계에 대해 원점부터 다시 생각해봤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거.....
아직 한번도 재희를 만나보고 싶다는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는 나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빠 입장에서는
나에 대한 믿음을 하루하루 테스트당하는 심정일거라는거..
"서희씨의 마음이, 이 남자와 끝내도 상관 없는 그런 마음이 전혀 아니잖아.
갑옷 하나 입지 않은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그 남자는 그 말 한마디로, 언제든지 서희씨를 찌르고 달아날 수 있게 된거야.
그런 빌미를, 여지를 먼저 줘버리면 안됐지.
서희씨 마음이 이렇게 큰 상태에서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랬어.
되도록 기회가 된다면 남자친구 마음 잘 달래줘요."
그후로도 여전히 오빠는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엄청난 싸움의 시초가 됐을수도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물론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나혼자서 주절대고 있는 상황이다.
오빠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까.
미안하다는 말로도, 후회한다는 말로도,
주워 담을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나는 오빠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오빠만 바라본 채로
심술 부리고 욕심만 내는 여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오빠가 재희 챙기고 나를 만나러 오는 몇시간을 기다리는 게 뭐그리 힘들다고
오빠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 누구와도 바꿀수 없는 재희를 들먹이며
말도 안되는 투정을 부려 오빠의 신뢰를 다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오빠의 미래에서 제외되겠다고 스스로 자처한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던 거다.
오빠 마음 다칠 줄도 모르고
왜 그렇게 함부로 말을 했을까,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오빠라는걸.
정신 단단히 차리고
곱씹고 되뇌어야 한다.
나를 향해 보여주는 오빠의 마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
오빠에게 미안했다는 말을 어떻게 다시 꺼내야 하는지,
애초에 얼마 있지도 않았을 신뢰를
어떻게 해야 그나마 되찾을 수 있을지.
너무 고민이 된다.
사랑 앞에서 뭘 가리고 가리지 말아야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서
후회하고 불안에 떨어야하는,
나이를 그냥 숫자로만 먹은 내가 정말 너무 너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