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고에서 러닝하기

그랜드서클 로드트립한 이야기 포함.

by 한눈팔기


1. 러닝의 기록

샌디에고에서 같이 살고 있는 하우스메이트 H는 러닝을 좋아한다.

샌디에고에 러닝하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매일매일 달리고 또 달린다.

사실 이곳 샌디에고는 정말 러닝하기 좋은 날씨와 환경을 갖고 있다.

아름다운 비치가 지천에 깔려있고, 낮의 햇볕은 너무나 강렬하지만 그래도 그늘에 들어서면 금방 시원하고 바람은 선선하다. 그러니 왜 달리고 싶지 않겠는가.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상의를 탈의한 남자들, 거의 탈의하다시피한 여자들,

개를 끌고 천천히 달리는 사람들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달리는걸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러닝이 열풍이지만, 이곳도 못지 않아서 매달 크고작은 마라톤 행사가 있다.

1년전쯤, H와 같이 살기로 결심하며 나도 러닝에 취미를 붙여볼까, 그럴수 있을까 생각하며

한국에 있는동안 열심히 연습을 하겠다고 H에게 약속했었는데,

한국에서는 전혀 달려본 적 없고 샌디에고에 와서야 조금씩 달리기 시작했다.

샌디에고에 온 지 얼마 안된 시기에 집앞 공원에서 몇번 달렸는데 원체 무릎이 좋지 않은 나는 아스팔트깔린 공원에서 몇번 달리다보니 무릎이 금세 시큰 거렸다.

그나마 아주 푹신한 트랙을 갖춘 근처 고등학교가 일요일에는 대중에게 개방하기에,

일요일을 기다려 트랙 위에서 달리기를 연습해왔다.

매주 1회 연습하면서도 나는 H와 함께 3월, 4월, 5월, 10월, 12월 마라톤까지 총 5개의 5K러닝을 등록해놓았다. (참고로 보통 5K는 참가 등록하는 데 40달러 정도 한다.)


3월 14일,

San Diego LEPRECHAUN RUN(성 패트릭 데이를 기념해서 열리는 테마 러닝 이벤트)

나의 공식 첫 러닝이벤트 참가날이었다.(마라톤이라 부르기는 머쓱하기에 러닝이벤트라고 칭한다)

아침 7시 30분쯤 퍼시픽 비치에 도착해서 해변 구경좀 하고

LEPRECHAUN(아일랜드 전설에 나오는 초록색 옷을 입은 작은 요정)

느낌 나게 초록색으로 잔뜩 차려입고 나온 러너들을 구경하며 슬슬 올라오는 축제분위기를 즐겼다.

슬슬 9시, 첫 러닝대회 출전이라 그런지 달리는 시간이 가까워오자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2,800명의 러너들이 팀을 나눠 출발했다.

(나는 2,800명도 엄청 많다 생각했는데, H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작은 규모 러닝대회조차도 만명이 넘게 참가한다고... 그래서 이건 꽤 작은 규모의 행사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신나는 음악을 한껏 볼륨업하고 출발했다.

안개비가 뿌리듯이, 살짝 흐렸는데 오히려 뛰기 좋았다.

초반에는 일부러 천천히 뛰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초반 1.5K 정도는 오르막길이어서 이때 정말 힘들었다.

그다음 반환점을 돌아 오는 1.5K 정도는 내리막길이어서 생각보다 괜찮은데? 싶었다.

이때부터 좀 속도가 붙었던것 같다.

2K 정도대에서는 곧 떠날 그랜드캐년 여행을 생각을 하면서 한참 뛰었더니 이내 1K가 훌쩍 지나가 있었다.

오 이거 괜찮네? 다른 생각하면서 달리니까 이렇게 시간이 금방간다고? 하는 생각에 "다른 생각을 해보자" 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턴 조금 힘들었는지 다른 생각이 더이상 나지 않았다.

골목길로 들어서 3K 정도 구간에서 러너들에게 물을 건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었는데 물을 마시면 속도 쳐진다, 쳐다보지 말자, 앞만 보고 뛰자 하고 계속 뛰었다.

3K부터 다시 오르막, 4K 정도 되니 다시 내리막이었건가?

하지만 3.5K 구간에서 아까 물 안마신걸 후회했다. 목이 타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한명씩 두명씩 추월하고 있었고 그게 꽤나 희열을 가져다 주었다.

저 앞에 여자 조금 속력 떨어지고 있는데? 내가 따라잡아야지, 하면서 달리니깐 정말 그게 됐다.

눈에 보이는 목표가 내 뒤로 멀어지는 경험을 직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건 엄청난 경험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러닝을 하는거구나, 정말 쉽게 잊지 못할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4.5K 진입했을때, 이 때가 마의 구간이었다.

정말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쉰 뒤에 다시 스퍼트를 내는건 생각보다 힘들다는걸 알고 있기에

앞에 가는 여자 따라잡자,라는 생각으로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결승점에 돌아오자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래도 한번도 쉬지않고 달렸다는것이 뿌듯했고 내 갤럭시워치로 잰 기록이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서 기록이 기대가 됐다.

기록을 확인했더니 29분 4초!!!!! 오오오오!! H조차도 놀란 기록이었다.

실은 최근 몸이 많이 무거워져서 35분 내로만 들어오자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처음 도전한 기록치고는 꽤 잘나왔다고 생각한다.

불과 3달동안 매주 1번씩 연습했을 뿐인데 이정도라니, 나는 내 스스로가 너무 대견하고 뿌듯했다.

전체 2089명 중 474등, 여자 1192명 중 142등, 내 나이 또래 여성 118명 중 13등!!! 달리기 초보치곤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매우 흡족했다.


나는 내 스스로가 체력이 꽤 좋다는것을 잘 안다.

어렸을때부터 쉽게 지치거나 피곤해하는 친구들에 비교하면 나는 쉽게 피곤해하거나 지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렸을때는 내가 그냥 무디고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서 힘들다는걸 캐치하지 못하는가보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정말 체력이 남들보단 괜찮다는걸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체력이 좋다는건 정말 복받은거라는걸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된다.

체력이 딸리면 사람이 예민해지기 쉽고, 무슨 일이든 버텨내는 힘, 밀고 나가는 힘이 딸리게 된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쉽게 감정의 기복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꽤나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어렸을때 아버지를 따라 매주 집근처 낮은 산을 올랐었는데, 어쩌면 그게 나를 이렇게 만든건지도 모른다.

나는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매주 등산을 갈 것을 권유하고 싶다, 아이를 "체력이 좋은 아이"로 키우는것은 그 아이에게 평생의 가장 큰 선물이 되지 않을까.


샌디에고에 와서 러닝도 시작해보고, 이런 이벤트도 참가해보고 너무 좋은 경험이었다!!

앞으로는 살도 빼고 꾸준히 더 많이 달려봐야지!

다가오는 4월 11일 5K 러닝에서는 더 좋은 기록을 얻고 싶은데, 크게 욕심은 내지 않으려 한다. 욕심내다가 부상이라도 입으면 병원가기 어려운 이곳에서 치명타이다.

이미 29분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뿌듯하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꾸준히 러닝을 해서 지방각지에서 열린다는 마라톤대회에 소소한 5K에 출전 많이 해보고 싶다. 실은 내 체력이면 10K도 좀더 연습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들긴 한다.

하지만 이 나이에 욕심은 금물!



2. 그랜드캐년, 그랜드한 캐년일뿐.


3월 중순 봄방학을 맞아 나는 H, B와 함께 그랜드 서클을 로드트립으로 다녀왔다.

그랜드 서클은 미국 서부 애리조나주, 네바다주, 뉴멕시코주, 콜로라도주, 유타주에 있는 자이언 국립공원,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 캐피틀리프 국립공원, 아치스 국립공원, 캐니언랜즈 국립공원, 메사버드 국립공원, 그랜드 캐니언, 화석숲 국립공원을 일컫는다.

자이언캐년, 브라이스캐년, 앤텔롭캐년(맞다. 많은 친구들의 카톡 프사에 등장하는 그곳), 홀스슈밴드(말발굽을 닮아 홀스슈밴드라는 이름이 붙여진 협곡), 그랜드캐년...거기에 데스밸리까지 다녀왔다.

사실 애초부터 그랜드서클 여행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다.

다들 미국하면 그랜드캐년, 하니까 그냥 가야할 것 같아서 갔을뿐.

역시나 내가 큰 기대가 없었던 이유가 있었달까.

그곳을 향해 달리는 길에 펼쳐지는 광경은 커다란 돌무더기 산, 산 위에 삐죽삐죽 솟은 바위들이었고.

삭막한 사막같은 풍경이 끝없이 펼쳐졌다. 별 볼 것 없는 도로를 무진장 달려야 했다.

가는 길에는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아 간신히 구글맵의 현재위치를 확인하며 달릴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내가 이렇게 흥이 안나고 벅찬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지 알지 못했다가 가는길에 잠시 펼쳐진 창밖의 큰 나무들이 있는 풍경에 기분이 좋아지는걸 느낀 뒤 알게 됐다. 나는 숲과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비단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H와 B 또한 나처럼 로드트립과 그랜드캐년에 실망이 크다고 얘기했다.

그나마 좋았던 것은 일몰 무렵 홀스슈밴드의 풍경과

정말 타는 듯이 더웠지만 그래도 유우니 사막같은 소금평원이 펼쳐져 있었던 데스밸리 배드워터배신(Badwater Basin).

데스밸리는 3월에 다녀왔는데도 정말 쪄죽을것 같았는데 여름에는 정말 가면 안될것같은 곳이다. 지형이 정말 특이해서 마치 게임 속 현실에 들어와있는 느낌, 화성에 와있는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다.


그랜드 서클 로드트립 중 있었던 에피소드.

지나다니는 차 조차도 몇대 없는 텅비어있고 가도가도 끝없는 도로위를 달리다가 차 바퀴 공기압이 빠져버리는 아찔한 경험도 했다.

간신히 찾은 가장 가까운 주유소는 그로부터 30분을 더 달려야 하는 곳이었다. 다행히 친절한 직원이 겁에 질린 여자 셋이 타고 있는 차에 공기압을 채워주었다.

여행을 하면서,그리고 일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으면서

내가 좋아하는게 무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된다.

이제 그랜드캐년 같은 여행지는 내평생 굳이 안가도 될것만 같다.

차라리 나무가 빽빽한 숲속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풀향기를 맡으며 걸을 수 있는 어느 이름모를 시골마을을 걷는게 나에게는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랜드캐년을 돌아보며 든 생각.

"와 우리나라 경상도, 전라도, 지방 구석구석 있는 산과 숲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감탄이 절로 나는데.

차라리 그런 곳을 다니고 싶다.

이런 삭막함이라니, 이래서 외국인들이 그렇게 환장을 하고 우리나라 산을 등산하려하는거구나.

다시 한국돌아가면 시골마을 구석구석 여행 많이 해야지."

다시한번 애국심으로 들끓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바쁘게 돌아다녔던 3월의 기록.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