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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노년의 문턱

잘 살아낸다는 것

by 버티기

모임을 같이 하는 친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다. 내가 평일 날 여행이나 골프모임에 번번이 빠지는 게 못마땅하단다. 모두 일하는 친구들이었지만, 평일 날 쉬는 건 자유로운 것 같았다. 새로운 분야로 진출해 눈치 보며 경력 쌓고 있는 나하고 많이 다른 듯했다. 한 친구는 더 구체적으로 "이제 일 그만하고 좀 쉬어라." 했다. 아마도 본인이 직장생활 끝물이라, 곧 쉬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거다. 어쨌든 '쉰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드는 빌미가 되었다.


요즘 혼자 있을 때 자꾸 되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길을 잘 걸어왔는지, 발자취를 보기 위해서다. 그리고는 발 밑을 쳐다보고 제대로 된 길 위에 서있는지 확인한다. 여기에 이르면 자연스레 10년 후, 20년 후..., 어떤 길로 걸어가고 있을까 상상해 보게 된다. 오직 나의 가치 기준과 생각에 의해서 찾은 길이지만, 자칫 잘 못된 길을 가게 될까 봐 우려스럽기도 하다. 한참 걷다가 새삼 다른 길을 찾기는 너무 늦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막상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다 여기고 있다가도, 친구들로부터 유난 떨지 말라는 힐난조의 이야기를 들으면 혼란스러워진다. 전문성 부족 탓에 풀리지 않는 문제로 혼자 고민하다, 가슴 답답해지면 부쩍 더 그런 생각이 든다. 또 더운 날 계단 오르내리며 허덕거리고 있을 때, 매일 등산하는 친구가 계곡물에 몸 담그고 웃고 있는 사진 올려놓은 걸 보면 맥이 빠져 버린다. 그러다가도 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보라매 공원을 가로질러 출근할 때면, '맞아, 이 길이 내 길이 맞아.' 하는 확신 들기를 반복하고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노랫가락 차차차’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제목은 낯설지만, 첫 소절 가사는 정말 익숙하다. 이 노래는 내가 태어난 1962년에 만들어졌다. 한창 전후 복구 시기로 삶이 궁핍해 놀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저 먹고살기 바빠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그러니 놀고 싶은 심정을 노래로 표현해 보고 싶었던 걸 거다. 거기다 이 시기의 평균 수명이 60세도 되지 않았으니, 시간에 쫓기는 마음이 되었을 것 같다. 이제 먹고살 만해지고 100세 시대라는데, 아직도 이 노래 가사가 회자되는 걸 보면 아이러니다.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이제 몸 안 좋으면, 놀고 싶어도 못 논다. 성할 때 부지런히 놀아야 해." 그야말로 젊어서 노세다. 아직 성성한 몸임에도 나빠질 것에 대한 조급증이 걸려 놀아야 한다는 논리다.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지만, 마냥 시간에 쫓기어 노는데 목맬 필요 있을까? 가끔 내가 나름 충실하게 살다가 맘대로 놀지 못할 때가 오면 후회하게 될까? 이 대목에는 선뜻 자신 있게 "아니다."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하기야 건강수명이 70세 정도이니 놀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는 하다.


나는 '살아낸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살아가다'가 단순히 흐름에 맡기는 수동적인 의미인데 반해, '살아낸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힘든 상황이나 역경을 이겨내며 역동적으로 산다는 의미이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성취감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이미지이다. 태어나는 순간, 잘 살아내야 할 숙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잘 살아낸다는 기준이 다르기에 정답이 있을 수 없지만, 그냥 흐름에 내맡기고 시간을 흘려보내면 후회할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살아낸다'에 중심을 두고, 하루를 충실하게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뿐이다. 중요한 것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가 일 것 같다. 설사 못 놀게 될 시기가 빨리 오게 되더라도, 당당히 잘 살아냈음에 뿌듯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거창한 삶이 아니라도, 자신이 걸어간 길을 후회하지 않으면 된다. 출근할 때, 땀범벅인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뛰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에게서 살아내고 있는 참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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