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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작스레 다가온 정리의 시간

'인간관계의 한계선'에 다다르다

by 버티기

기분이 계속 가라앉았다.

9월 초순부터였으니 한 달을 넘겼다. 무얼 해도 의욕이 나지 않고, 잡생각에 머리만 무거웠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계획한 골프모임도 소용없었다. 구상과 어긋난 팀 구성, 아내의 몸살감기가 겹쳐 오히려 감정소모만 더 커지는 계기로 전락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잠도 온전히 이루지 못하는 현상이 생겨버렸다. 잠자리에 들면 침대가 푹 꺼져버리는 느낌으로 몸을 뒤척이게 되고, 새벽시간에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취업해서 모르는 길을 찾아가야 하는 시기, 하나씩 깨우쳐가는 희열에 의욕이 솟구쳤다. 전임자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액셀시트에 박힌 수식의 의미를 파헤쳐야 할 때도 사명감은 살아 있었다. 경험 있고 기술 가진 자들의 집요한 텃세도 특유의 인내심으로 잘 수용하고 버텨왔다. 이제 근무한 지 10개월째, 모든 게 익숙해지고 푸근한 마음이어야 할 시기에 슬럼프가 와버렸다. 당장 일을 그만두고 싶은 욕구가 들썩였다. 그때마다 마음을 붙잡아 줄 누군가가 그리웠다. 하지만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 큰 충격 없이 넘길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침잠의 시기가 가볍게 흘러갈 줄 알았다.

삶의 경험도 적지 않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도움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올시다였다.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우선적인 대상은 가족이었다. 아내는 가장 가까워 스스럼없어야 하지만, 기대가 크다는 것을 잘 알기에 말하기 부담스러웠다. 자식들은 자기들 앞가림하기도 바쁘기에 엄두도 내지 않았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스스로의 의지도 한몫했다. 오히려 표정을 읽혀서 추궁을 당할까 우려해 밝게 지내려 애썼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다가서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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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친구들이 있으니 수월하게 벗어날 줄 알았다. 결론은 나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 줄 만큼 감정적 여유가 남은 친구는 없었다. 자신들도 허덕이고 있으니까. 대부분의 친구들은 삶의 중심이 일에서 벗어나면서 밀려든 공허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고민은 그들에게 부자의 배부른 고민과 같은 거였다. 그나마 같은 길을 걷는 사람도 분야가 틀리거나 삶의 결이 틀려 털어놓기가 꺼려졌다. 결국 만나도 말은 꺼내보지 못하고, 농담 같이 객쩍은 이야기로 일관하다 헤어지곤 했다.


미친 듯 노래도 불러보고, 감성 에세이를 읽거나 잔잔한 음악도 들었지만 별 소용없었다. 그냥 시간에 기대어 막연히 풀리기만 바라기로 했다. 생각할수록 의문스럽다. 가족은 나의 의지가 작용했다지만, 친구들 문제는 심각했다. 털어놓고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던 그 많던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어떤 친구도 영원할 수는 없다.

이렇게 오래, 깊게 막막해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 친구 관계라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저 웃고 즐기면서 만나는 많은 친구들도, 정작 필요할 때는 곁에 있지 않았다. 결국 이 나이대는 '인간관계의 한계선'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접점이 넓은 관계는 존재할 수 없으며, 현실적으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스스로 빠져나갈 수 있는 내성을 길러야 한다는 절실함이 느껴졌다. 누구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자신과 싸워 극복해 내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것임을 말이다.


친구 관계 정리를 시작해야겠다. 아쉽지만 이제까지의 관계는 여기까지다. 불필요하다면 끊어내고, 가능성이 보이면 더 친밀해질 수 있는 관계로 성숙시키고 싶다. 내가 사는 방식도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중심을 두기보다는 과정을 즐기는데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더 친근해질 수 있는 친구 관계를 위해 여백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매몰되어 있으면,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기 힘들다. 늙어간다는 것은 거스르기 힘들지만,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지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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