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의미
지금은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북한산 오르면서 어느 친구에게 한 말이다. 자격증은 많으면서도 일 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다. 마침 힘겨운 격일제 근무를 하고 있던 터라, 그런 말 할 자격은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진 자격증의 무게는 예사롭지 않았지만, 나이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자격증에 걸맞은 자리에 수도 없이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힘겹게 미래를 준비해 온 것에 비해 초라한 결과를 받아 든 것이 힘들다고 말했다.
얼마 후, 취업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자격증과 연관성이 떨어지는 건물 경비원이 되었단다. 아내와 같이 종로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의 아내는 나에게, "좋은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요."라고 했다. 아마 남편의 눈높이를 낮춰준데 대한 표현 같았다.
인왕산 길에 다시 만난 그는 활기차 보였다. 쉽지 않은 주야비 근무지만 일하고 있다는 것이 뿌듯하다고 했다. 근무 대기 시간에 책을 보기도 하고, 관심 있는 분야의 공부도 시작했단다. 내가 격일제 근무를 시작하면서, 같은 시간을 이용해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 생각났다.
일을 꼭 해야 만 할까? 오래 근무한 직장에서 퇴직을 앞둔 사람이 가지는 공통된 고민거리다. 두 가지 심리가 겹친다.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받고 싶다는 것과 아직 쌩쌩한데 마냥 쉰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다. 나의 경우 노고를 보상받고 싶은 것보다, 마냥 쉰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막상 퇴직하면,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뉜다. 고민만 하는 사람과 일단 저질러 보는 사람이다. 신중하게 고민해서 후회하지 않는 길을 택한다면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문제는 고민이 끝없다는 것에 있다. 그 고민 중심에 내려놓지 못하는 심리가 깔려있다. 무조건 저질러 사건을 만드는 것도 문제일 수 있지만, 고민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더 심각하다.
고민의 원인은, 이전에 누렸던 사회경제적 위치에 대한 미련이 크게 작용된다. 해오던 업무와 관련된 일을 가질 수 있다면 좋지만, 그야말로 환상에 그칠 공산이 크다. 빨리 내려놓는 것이 급선무다. 이왕이면 젊고 부리기 좋은 사람을 쓰기 마련인 생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못할수록 출발이 늦어지고 상황은 더 어려워진다.
경제적 여유가 많아, 그동안 못해본 것만 하면서 지내는 사람도 있다. 이 글의 대상은 이 사람들이 아니다. 나와 같이 그리 풍족하지 않은 여유와 마냥 쉬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보면, 의외로 이런 류의 사람들이 많다.
일을 하면 대표적으로 경제적 충족, 자존감 회복, 건강 증진이 얻어진다. 누구에게든 밥값 내는 것이 두렵지 않다. 아직 사회에 뭔가 기여하고 있다는 기분은 짜릿하다. 부지런히 오가며 자연스럽게 하는 많은 활동이 몸을 활성화시킨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얻어지는 이득은 비교할 수 없다.
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한 공감이 된다면, 내려놓고 저지르기를 권한다. 물론 가능성과 합리적인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겠지만, 그 기간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그래도 내가 왕년에' 의식 만은 버리기를 바란다. 뭔가를 저질러 놓고 보면, 가야 할 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일단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서, 또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