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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트바스 Nov 01. 2020

페이퍼리스의 삶에서 페이퍼풀의 삶으로

저 물욕 있어요



한참 다이어리를 향한 욕망이 꽃피었다. 


그 처음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이내 사그라들었지만, 회사에 다시면서 다시 다이어리가 필요해졌다. 적지 않고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분홍색이 그날따라 마음에 들었던 건지, 쨍한 핑크색 다이어리를 손에 집어 들었다. 평생동안 쓰리라고 다짐하면서, 큰맘먹고 가죽 바인더를 사기로 했다. (가죽은 진짜 좋은건줄 알았다) 다짐은 2년이 채 못 갔다. 


핑계를 대자면 그건 사이즈를 잘못 선택해서 사용하던 내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큰 다이어리가 좋겠다고 생각하며, 손바닥 두 개 만한 크기에, 튼튼하고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검은색 바인더를 샀다. 나는 또 이거야말로 평생 쓸 거라 다짐했다. 예상대로 그것은 날마다 유능한 비서 역할을 해 주었다. 하지만 퇴사를 하면서 더 이상 그 가치를 하지 못하고 원래 포장되었던 상자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나는 한동안 백수생활을 영위하며, 고심 끝에 아이패드를 장만했다. 더 이상 새해 다이어리나 바인더를 가지고 다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아이패드를 쓰면 나무를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겠지?’하고 억지로 생각했다. 그렇게 페이퍼 리스(Paperless)의 삶을 지향하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쓰던 이북 리더기도 중고로 팔아치웠다. 아이패드로 책을 읽고, 거기에 딸린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얼마 없는 스케줄도 적으며 다신 노트 따위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은 1년을 채 못 갔다.




교복을 입던 시절, 새 학기가 되면 팬시점에 들러 500원쯤 하는 노트를 과목별로 골라 사곤 했었는데 나는 아마 그런 마음이었나 보다. 종종 나는 물욕 없는 애라고 외치면서도 ‘한정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노트의 '구입'버튼을 눌렀다. 한정판. 그것은 사람을 조급하게 한다. 그 큰 아마존의 세계에 딱 세 개 밖만 남은 그 공책 세트를 나는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또 다이어리, 바인더, 노트- 이런 것들 앞에서 또다시 거금을 쓰게 된 것이다. 기껏 해서 '종이 묶음'을 사는 일에 10만 원도 넘는 돈을 쓰는 게 과연 맞는가 싶은 마음도 슬쩍 들었지만 10권이니까. 하고 또 합리화를 시도해본다.


새로 들인 노트는 내지가 고와 그 색이며 결이며 마음에 들었다. 표지가 좀 부실해 보여 마음에 드는 원단을 사다가 덧댔다. 이제 좀 폼이 난다. 한 권은 일에 관한 아이디어를 적고, 또 하나는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수집하기로 한다. 또 한 권을 고심해서 골라(열 권 모두 내지 무늬가 다르다) 그건 일본어를 공부할 때 쓸 노트로 정했다. 연두색 가름 끈이 달린 노트는 전처럼 플래너로 사용하며 일과를 계획하기로 했다.


내 애인은 일평생 다이어리를 써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지난 5년여간 한 번도 보질 못했다) 나는 아마 펜으로 뭔가 쓰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거 아닐까. 아니면 그냥 이것저것 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걸까. 자꾸만 이것저것 사는 내가 왜 이러나 싶다가도, 내 마음에 드는 좋은 것을 써야 또 애정이 간다고 핑계를 대본다. 아직 뜯지 않은 노트가 여섯 권. 아마존에는 이제 한 세트가 남았다. (그것도 사고 싶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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