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는 사람에게는 흔히 물어지는 질문이 두가지 있다. 첫번째는 제주도는 어디가 제일 좋으냐는 물음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꽤나 답을 미루게 된다. '섬 것'이 아닌 사람에게 제주는 보통 여행지이고, 여행의 취향이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럴때마다 나는 꽤 곤란해지고만다. 액티비티한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차분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제주를 찾는 사람 중에는 대개 바다를 좋아하지만, 바다보단 산이 좋다는 사람도 만났었다. 내가 만난 제주여행의 어떤날은 중산간 언덕에서 보는 별이 좋았고, 또 어떤날은 파도가 코앞으로 밀려오는 카페에서 가장 좋아하는 자리를 차지하고선 카페라떼 마시는 일을 최고라고 여겼다. 나는 그냥 우도가 좋다거나 저쪽 세화에 갈 일이 있으면 플리마켓에 들려보라고 하는 말들로 얼버무린다.
두번째는 한라산을 올라봤냐는 질문이다.첫번째에 비하면 쉽다. 나는 한번도 한라산을 오른 적이 없으니 재빨리 노!를 외칠 수 있다. 그런 내 답을 듣고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제주에 있으면서 도대체 한라산도 안 가보고 뭐 했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서울 사람들도 모두 남산에 올라가 보지는 않지 않나요?)
나에게는 산을 오르는 취미가 없었다. 어린시절 동네뒷산이나 성묘를 위해 산소에 라도 가게되는 날에는 풀벌레가 내 다리에 붙어 있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긴장하곤했다. 어른의 몸이 되자, 아주 가끔은 흠뻑 땀을 흘리고 싶은 날이 생겼다. 그치만 심폐능력과 체력은 저절로 자라는 게 아니었다. 제주에 살기 몇해 전 어느 날은 마음먹고 등산모임에 따라갔다가 페이스를 못 맞춰서 한껏 민폐를 끼친 적도 있었다. 산이건 언덕이건 올라가는 일이 생기면 언제나 맨 뒤쪽은 내 몫이었다.
내가 천천히 오른대도 흔쾌히 괜찮다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종종 그 사람과 함께 어딘가를 올랐다. 몸을 혹사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날은 혼자라도 올라보자고 결심 하기도 했다. 봄햇살이 따스날 어느 날을 골라 산을 오르고 바다를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원도 어디쯤 트래킹코스가 유명하다는 산을 골랐다. 완만한 경사를 가진 선자령이다. 선자령은 대관령 북쪽자락에 붙어있는데, 굳이 산이 아니라 령으로 부르는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그 산을 추천한 이는(인터넷 어느 사이트였다) 선자령은 어린아이도 올라갈 수 있을 만큼 경사가 완만하댔다. 총 4시간 코스로 약 12km 구간이다. 라고 분명히 쓰여 있었는데, 나는 무려 6시간동안 산을 올랐다. 누군가는 겨우 그정도라고 하겠지만, 이렇게 길고 길고 긴 산은 생애 처음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슬리퍼를 신고 저 산을 오른 어린아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 생에, 오로지 내 의지로 그렇게 오래도록 걸었던 적이 있었나. 나는 숨을 헐떡일때마다 아빠가 떠올랐다. '너 그거 다 운동부족이야' 그말을 들을 때는 나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는데, 이제는 맞는것 같기도 하다.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겨우 종착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득함의 대가일까. 선자령은 그동안 오른 어떤 산보다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었다. 바람이 너무 세서 나비는 날지 않고 풀을 꼭 붙잡았다. 선자령이 아니라면 이 바람을 느낄 수 있었을까. 백두대간 능선을 걸으며 마시는 신선한 공기, 새파란 들판. 거기에 하얗고 커다란 풍력발전기가 멋을 더했다. 그 길에는 그런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여행이 끝난 후 나는 자주 그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얻은 것은 또 있었다. 그저 내어진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그 끝에 다다른다는거다. 겨우 하루, 그곳을 올랐을 뿐인데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꿈틀댔다.
강원도에 선자령이 있다면 제주에는 한라산이 있다. 일상을 사는 동안 선자령에서의 기쁨을 잊고 지냈는데, 제주에 온 뒤로는 오름에 몇 번 오르고서야 다시 올라가는 행위의 즐거움을 되찾고 있었다. 이제는 한라산을 눈독들일 차례다. 제주에서는 어디를 가던 한라산이 보인다. 옛 제주사람들은 한라산이 제주를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래서일까. 나도 가끔은 어디서건 보이는 한라산이 그 자리에 꼭 붙어서 나를 지켜봐 주고 있는 것 같아 안심하는 마음이 들곤했다.
제주는 그 자체로 한라산이라고 볼 수 있다. 한라산 그 깊은 속살을 살피면 숲길이며 곶자왈이며 온몸으로 제주를 느낄 수 있다. 맑은 날, 서귀포 어디쯤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그 산에 오르지 않아도 백록담이 보일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또 어떤 날, 우연히 그 능성에 시선이 닿는 때에는 넋을 놓게되는데, 특히 해질녘 모습은 더 아름다워 사진기를 들지 않으면 못배길만큼 아름답다. 나는 그럴때마다 저 산에 언제 오르게 될까 하고 생각했다.
9박 10일의 네팔 여행이라면, 나는 안나 푸르나를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핑계를 대 보자면 내 여행은 정해놓은 끝이 없으니 쉽게 결정이 되질 않는 것이다. 제주에 있는 동안 나도 언젠가 한 번은 한라산에 올라가리라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게으른 나는 도통 결심할 수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한라산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어느 날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여행자가 가을의 영실코스(한라산을 오르는 다섯 가지 정식 코스 중 하나) 사진을 자랑스레 보여줬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휘몰아치는 그 사진은 정말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가을에는, 그러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한라산에 올라볼까. 한라산에 다녀오면, 이 여행의 대부분은 끝나버린 것 같은 허무함이 몰려오면 어쩌나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 나는 아무래도 이곳에 일 년 쯤 더 머물러서 봄의 진달래밭, 여름의 물찻 오름, 가을의 영실 그리고 겨울의 백록담까지 가봐야겠다. 나는 계속해서 제주에 머무를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