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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03. 2023

유리같은 행복

이혼하면 어때 #5

남들보다 부족하게 결혼 살림을 시작했지만, 두 사람 모두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합의 하에 시작한 딩크부부로 만족하며 살았지만, 신혼 시기가 지나자 아이가 없다는 것에 약간의 허전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허전함을 채워준 것은 다름 아닌 작은 고양이였다.


신혼집은 서울 내 직장 근처 작은 전셋집이었다. 그 집은 허름하지만 햇빛이 무척 잘 들어왔는데, 거실로 쏟아지는 커다랗고 따사로운 햇볕 광선은 꼭 새로운 가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길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큰 가방을 들고 급하게 집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지퍼를 열자 겁에 질린 고양이 한마리가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등에는 응급처치한 커다란 거즈가 붙어있었고 빨간 혈흔이 새어 나왔다.

'유리'라고 불리는 그 아이는 처가에서 결혼 전까지 아내가 키운 고양이였다. 그녀는 나의 고양이털 알레르기 때문에 결혼하면서 처가에 놔두고 왔었다.


그 후 장모님이 유리를 주택 지하실에 방치해 키웠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고양이에게 심하게 물려 등 피부가 갈라지고 뼈가 보일 만큼 다쳤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나에게 묻지 않고 다짜고짜 우리 집으로 데려 왔는데, 상처가 심해 일단 여기서 치료해 보자고 합의하였다.


같이 살기 시작한 1, 2년 간 유리는 나를 무척 싫어했다. 옆을 지나갈 때마다 앞발로 내 발목을 있는 힘껏 치거나, 누워있는 나를 지나칠 때 배려 없이 밟고 쌩하니 지나갔다. 친해지고 싶어 얼굴을 들이민 내게 냥냥펀치를 날리거나 발톱으로 할퀴는 건 다반사였다.


아내 무릎 위에 올라가 있을 땐 항상 나를 주시하며 일자 눈이 되어 경계했는데, 자기가 더 친하다며 으름장을 놓는 표정이었다. (실제로도 나보다 더 가까웠지만.) 그 태도는 자기보다 서열이 밑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었는데 그것을 뒤집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


나는 고양이털 알레르기로 인한 심각한 비염 증상에 시달렸다. 매일 밤 콧물과 눈물을 흘리는 고통을 감당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내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내 증상을 완화 시키려 애썼지만, 새 집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콧물과 재채기를 달고 살았다.


시간이 지나 유리는 나와 공동운명체임을 깨닫고 적대적인 태도를 지웠다. 그 무렵부터 내 발등에 유리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 느낌은 매우 따스하고 사랑스러웠는데 유리의 체중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웅크림이었다.


"귀찮게... 왜 내 발밑에서 자고 그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관심 없는 척했지만, 유리가 깰까 노심초사하며 내 몸은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조금은 기뻤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을 터놓은 유리는 나와 많은 시간을 같이 했다. 먹고, 놀고, 싸고, 그루밍하고, 꾹꾹이 하고, 자고,........ 그렇게 우리는 함께 나이를 먹어갔다.


15살을 넘긴 유리는 그루밍 시간이 적어지고 점점 꼬질꼬질해져 갔다. 그리고 자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루의 대부분을 자고, 깨어있는 시간은 3~4시간 정도인 것 같았다. 그래도 퇴근하고 집에 오면 하루 종일 내 뒤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내가 큰 볼일을 위해 화장실 문을 닫으면 그것도 못 참고 문 앞에서 울며 나를 찾았다. 잠시 PC앞에 앉아있을 때도 본인의 앞 발을 내 발등에 올리고, 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자려고 누울 때면 반드시 옆에 잠시 머물다 자기 자리로 사라졌다.


유리의 존재는 우리 부부에게 매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유리는 아내보다 나를 더 좋아했다. 그 이유를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씻기고, 발톱 깎고, 털 빗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싫어한대.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고 하더라."


맞는 말 같았다. 또한, 우리 부부가 한참 싸우고 나면 아내는 내게 이 말을 덧붙였다.


"유리 없었으면 오빠는 벌써 나한테 버림받았어. 유리한테 고마워하면서 살아."


그때는 그 말이 진심인지 몰랐지.


어느 날, 유리가 급격하게 살과 털이 빠지며 병색이 완연했다. 온갖 병원을 돌아다니며 진단을 받았지만 부정적인 답변뿐이었다. 동물 병원에 입원시키며 회복하길 기대했지만 한 달 월급보다 큰 청구서만 남았다.


결국 집으로 데리고 돌아와 매일 우는 아내와 꼼짝도 안 하고 웅크려 있는 유리를 보며 힘든 나날을 지냈다.

그러다 극적으로 인터넷 카페에서 소문난 동물병원을 찾아 신부전과 당뇨 증상을 거의 정상에 가깝게 회복시켰다. 평생 동안 매일 오전, 오후 8시에 인슐린 주사를 놓고 케어해야 하지만, 유리와 좀 더 보낼 수 있다는 즐거움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코 고는 유리가 너무 좋았다. 생긴 건 천사같이 생긴 것이 코 고는 소리는 우렁차고.


코오오오오옹. 코오오오오옹.


유리의 이 소리, 이 평화가 너무 좋아 나를 안도하게 했다.


그리고


유리가 17살이 되던 해에 아내는 처음 유리를 데려온, 꼬질꼬질한 가방에 다시 넣고 떠났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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