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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써니 Oct 24. 2022

게으른 엄마는 동굴이 필요하다

동굴 대신 두꺼비집

남자는 가끔 동굴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남자들은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고...





우리 집은 반대다. 신랑은 동굴이 필요 없다. 혼자만의 시간은 더더욱 필요가 없단다. 이직 기간 중 짧은 잉여의 시간,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귀한 시간이기에, 그간의 고생을 무엇으로라도 보답하고 싶기에 혼자 어디론가 다녀오라 부추겼던 적이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진한 진심을 가득 담은 제안이었다.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오라는 말에 이 사람은 제3외국어라도 들은 듯 세상 의아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나 혼자? 왜…? 싫어.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혼자 남는 동굴이나 '나는 자연인이다'의 산속보다는 북적이는 멀티플렉스나 조명이 가득한 프리미엄 아울렛이 어울리는 그런 사람.




그때 알았다.

아 내가 원하는걸 모두가 원하는 건 아니구나..



나는 동굴이 필요한 사람이다. 무서워하는 것이 많아 자연인들처럼 산속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적당히 고요한 도시에서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 꼭 필요한 그런 사람이다.


결혼 이전에도  붙어 다니고 싶어 하던 헌신적인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 있었음에도 주기적으로 '나의', '나만의' 시간을 내어야 했다.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을 가고, 집에서 뒹굴거리고.. 시간이나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돌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건 나에게 최고의 힐링이었다. 직장인의 숙명처럼 평상시에는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눈에 불을 켜고 외부만을 주시하고 있어야 했으니  반대로 쉼을 위해서는  내부를 들여다보고 맞춰주는 시간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정서적 충전의 시간, 신체적 충전만으로는   없는 그러한 인간형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혼자 영화는커녕 혼자 티브이 앞에 늘어져라 누워 있을 수도 없었고, 혼자 여행은커녕   구멍가게도 홀연히 다녀올  없었다. 실제로 어느 일정 시기에는 문을 닫고 볼일을 보는 것조차 사치일 정도였으니 인간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침해받고 있다 느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안을 들여다보기는커녕  거죽도 살필 여유가 없는 나날이었다.


10년 동안 부지런히 쓴 스마트폰 초창기 모델처럼 충전 효율이 바닥을 쳐 수시로 방전이 되어버리던 나는 하루하루 주어진 퀘스트를 달성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처럼 홀연히 나만의 '동굴' 찾아 떠날 수도, 숨을 수도 없었다

아기띠라 불리는 후천적 탯줄에 한 몸처럼 묶인 채로 잠깐잠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는 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또 무언가에 홀린 듯 살아내지는 것이 엄마의 일상이었다.






멋들어진 동굴로 당장 떠날 수 없어 지금 이곳에서 두꺼비집이라도 만들기로 했다. 

티브이 대신 잔잔한 라디오를 켰고, 알록달록 그림책을 내려놓고 활자가 가득한 두꺼운 책을 집어 들었다. 주말에는 동굴이 필요 없는 신랑에게 모든 걸 맡기고 어디로라도 나섰고,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꽃 아저씨에게 즉흥적으로 노란 프리지어 한 줌을 사들고 오기도 했다. 단돈 5000원의 행복. 남들이 하루에도 수시로 마시는 커피 한 잔 가격이었다. 그 5000원으로 꽤 오랜 시간 숨이 쉬어졌다. 


엄마의 동굴은 책이었고, 글이었고, 라디오였고, 꽃 한 줌이었고, 따뜻한 차 한 잔이었다. 작은 사람인 건 어딜 가지 않는지 나만의 '동굴'이란 이처럼 소박하고 소소했다.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날 행복하게 할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삶의 순간순간 훨씬 행복한 법이다. 동굴이 너무 멀리에 있다고 울상만 지을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흙을 파내어 간이동굴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거창한 행복보다 소소하고 자잘하고 우습기까지 한 '행복'들로 하루를 채우다보면 어느 순간 멀찍이 있는 동굴이 잊혀질지도 모를 일이다. 까만 눈동자와 따수운 내 편의 토실한 뱃살이 가까이 있는 곳이니 더 정이 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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