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써니 Aug 23. 2022

까막눈 꼬맹이의 SWAG

까막눈 : 문맹을 뜻하는 순 우리말로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집 꼬맹이는 요즘 그 '까막눈'을 막 벗어나려는 아슬아슬한 시기이다. 엄마인 나의 솔직한 마음은 어느 날은 빨리 혼자 읽었으면 좋겠고 어느 날은 또 천천히 이 시기를 좀 더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글자를 늦게 익힐수록 '창의력'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일부러 그 많은 그림책을 읽으면서도 손가락으로 글자 한 번 짚어주지를 않았다. '너는 글 이외의 다른 것들을 보렴' 책을 워낙 좋아하던 아이인지라 너무나 자연스레 글자를 '스스로' 익히게 되지 않을까..생각했던 우아한 엄마의 막연한 기대, 그리고 약간의 오만이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 

내 아이는 '글자'에 관심이 없었다. 없어도 너무 없었다. 주변 아이들이 하나 둘 글자를 읽고 쓰기 시작할 때까지도 글자가 영 안 보이는 듯 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담뿍 담긴 친구의 편지를 꼬깃꼬깃 접어 가져와서도 "걔는 글자를 알더라?" 뭐 그 정도의 반응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엄마의 마음은 하루는 조급해졌다가 하루는 평정심을 유지하길 반복했다. 사실 급할 건 없었다. 지금 글자를 모른다고 해서 스무 살 성인이 될 때까지 글자를 익히지 못할 게 아니었으므로 굳이 지금 한 두 달 먼저, 혹은 늦게 글자를 익힌다 해서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글자를 모르는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속상해한다면 그건 문제였다. '나만 몰라...힝..' 뭐 그런 생각에 마음이 다칠까 그게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글자'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 무조건 들이댈 순 없었다. 아이가 필요로 할 때를 기다려주기로 결정했다. 뭐..엄마 혼자 조급해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자기도 글자를 알고 싶다고 했다. 친구가 읽는 글자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유레카! 드디어 이 꼬맹이에게도 알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생겼나 보다. 신이 난 엄마는 책을 샀고, 한글공부가 주가 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때까진 알지 못했다. 이 꼬맹이는 글자가 알고 싶었을 뿐, '글자공부'가 하고 싶었던 건 아니라는 것을. 그걸 깨닫고부터 6살 꼬맹이와 엄마 사이는 급속도로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엄마와의 글자공부는 아이의 흥미와 자존감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고, 글자를 보고 아무말이나 지멋대로 떠들던 꼬맹이도 어느 순간부터는 글자 자체를 읽고 싶지 않아했다. 틀리는 게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다른 것보다 그게 제일 문제였다. 

우리 꼬맹이는 원래 그런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영유아 구강검진을 갔을때였다. 멀찍이서 이런 저런 기입을 하고 문진표를 작성하는 동안 꼬맹이 먼저 간단한 검사들을 받기 시작했다. 키를 재고, 몸무게도 재고 간호사 선생님과 두런두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적한 병원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꽤 여러 항목이 나열되어 있는 문진표를 작성하느라 집중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육! 팔! 칠! 삼! 음.... 오!!!!!!"


이게 뭐람.

우리집 꼬맹이 목소리가 분명한데 싶어 두리번 거리다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커다란 숟가락으로 한쪽 눈을 가리고는 숫자판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수..숫자판?'


"팔! 사! 삼!!"


푸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어쩌다 숫자 몇 개만 아는 꼬맹이가 너무나 자신있게 아무 숫자나 우렁차게 읊어대고 있었고 선생님은 의아한 듯 걱정스러운 듯 숫자표를 찍은 작대기를 한단계씩 계속 올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어찌나 뿌듯한지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른 채 나를 보고 씨익 웃어주었다.


아이들 시력검사 판은 한쪽면은 그림으로, 한쪽면은 숫자로 되어 있는데 검사 전에 선생님께서 숫자를 아느냐고 물으셨던가 보다. 이런 저런 숫자 몇 가지를 알던 그 시기의 꼬맹이는 자신있게 안다고 대꾸했고, 그 자신감에 선생님도 깜빡 속아 숫자판으로 시력검사를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 결과 꼬맹이의 시력은  0.2 - 0.1 이었던가...아무튼 안과에서의 '재검 필요' 소견을 받게 되었다. 그날의 자신만만한 꼬맹이의 뿌듯한 표정과 우렁찬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맞고 틀리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나는 그저 느낌대로 읽을 뿐이라는 그 담대함이란. 요샛말로 그거야말로 'SWAG'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 꼬맹이에게는  때묻지 않은 '스웩' 필요했다.  멋대로 일단 읽고보는 자신감, 뭔진 모르지만 해냈다는 뿌듯함,  그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어려운, 남들  한다' 한글 교재 같은  덮어버렸다. SWAG에 교재라니..안될말이었다.







"마! 보! 주!! 음...나!!!"


이제 꼬맹이는 주차장에 세워진 자동차 번호판의 글자들을 마구 읽고 다닌다. 아직 '글자'를 익히지는 못했지만 'SWAG'만은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 날의 숫자판처럼 수시로 '재검'이 필요한 실력이지만 다시 읽는 재미를 알아가고 있는 건 분명하다.


조만간 다시 오지 않을 까막눈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같다. 반쯤은 아쉽고 반쯤은 꼬맹이의 새로운 세상이 기대된다.

이전 06화 게으른 엄마는 동굴이 필요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