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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써니 Sep 14. 2021

주먹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기

게으른 시선

아이가 하루 종일 자기 주먹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기가 왔다. 

왜 그러고 주먹만 쳐다보고 있냐며 손을 잡아 내리고 딸랑이를 흔들어대면 아이는 꼭 밟아야 하는 그 중요한 계단을 폴짝 뛰어넘어버릴지도 모른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작디작은 생명체가 자기 손을 처음 마주한 날. 그것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선명히 눈에 띄고 바로 보기 시작했더니 그제야 '손'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왼손도 찾았는지 '넌 또 뭐냐'는 표정으로(기분 나쁘고 거추장스럽다는 듯) 왼손도 뚫어져라 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은 곧 발에도 닿았고 억지로 끌어올린 두 발이 입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제 알았다는 듯 평화로운 표정을 되찾았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지 스스로 손과 발을 찾아내고 기어코 입에 넣어 진지하게 음미했다.




한 손에 잡히던 때부터 고관절 보조기를 채우고 생활한 탓에 제 멋대로 움직일수도 없었던 아기였다. 좋아질 것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었으나 오랜 시간 보조기 생활로 제 때 뒤집고 밀고 기는 모든 움직임 자체에 문제가 있을까 그것은 내심 걱정했던 기억이다.


비슷한 월령의 아이들의 성장 발달 이야기에 '아 이제 뒤집나 보구나.. 이제 배밀이를 하는 친구도 있구나..'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당장 욕심낼 수 없는 일이기에 입밖에도 내지 않았지만 우리 아이도 엉덩이를 한껏 들고 힘주어 기는 모습을 그리고 또 그리곤 했던 것 같다.




엄마의 걱정은 역시나 무색했다.

누구보다 단단하고 멋진 아기는 보조기를 졸업하기 무섭게 며칠 지나지 않아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끙차끙차 돌아보려 애쓰느라 안되면 울어대며 성질도 부렸다. 그 울음도 승질도 결국엔 지가 해내고자 하는 애씀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안다.


겨우겨우 몸을 돌리고도 머리가 무거워 팔이 빠지질 않아 또 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무거운 머리도 들어보고 지금껏 누워 보던 세상을 엎드려서 보기 시작했다. 고개도 충분히 들리지 않아 이마 한가운데 주름이 질 정도로 눈을 부릅뜨던 우스운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DNA 어딘가에 메모리가 되어있는 듯, 남들보다 조금 늦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알고라도 있었던 듯 아이는 그때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기었고 갑자기 앉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앉아서 엄마를 쳐다보던 아이를 보고 뭐가 그리 급하냐며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터지기도 했었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자기가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기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이유식을 시작할 즈음이 되자 뚫어져라 엄마 아빠의 오물거리는 입만 쳐다보며 자기의 다음 스텝을 스스로 익혔다. 첫 숟가락을 입에 대고는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는지 세상을 잃은 듯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도 결국은 포기하지 않았다.


바들바들거리면서도 소파를 잡고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렸고 몇십 번 엉덩이를 찧어도 다시 서고 다시 섰다. 양 손을 떼고도 넘어지지 않으려 발가락 한가득 힘주어 바닥을 잡고 일어나 짓던 그 뿌듯한 표정이란..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산악인의 표정이 그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아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시로 조바심이 드나든다. 그때마다 내 아이가 얼마나 위대한 아기였는지 기억해낸다. 누구보다 느렸지만 결국 뒤집었고, 수시로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결국 일어나 섰으며, 그 맛없는 이유식을 울며 애쓰며 몽땅 씹어 넘겼다. 지금의 나라면 진즉에 포기하고도 남았을 일들을 해낸 이 아이는 앞으로도 못할 것이 없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이내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눈이 다시 게슴츠레해진다. 적당한 게으름. 그 작은 아기가 자신의 때를 알고 해야할 일들을 알았던 것처럼 조금 게으른 시선으로 바라본 아이는 엄마의 생각,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칫 불필요한 개입과 참견 때문에 뚫어져라 쳐다보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손'처럼 평생 자기의 무언가를 잃어버린채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이 있을까. 천천히 기다리기만 하면 아이는 제 때를 타고 어디론가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비록 기대와는 다른 맛없는 이유식 같을지언정 우유에서 밥으로 넘어가는 위대한 과정이라 생각할 수 있기를. 나역시 그 과정과 과정 사이 잠깐의 흔들림과 미적거림에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엄마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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