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삽니다
우리 아이의 할머니 두 분은 하나뿐인 손주를 끔찍이 이뻐하신다. 아까울 게 없을 것처럼 바라보고 잠깐잠깐 잡은 손도 그보다 귀할 수가 없다. 자식보다 손주가 더 이쁜 법이라더니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자식'이라는 이름의 입장으로 손주를 대하는 할머니들을 보고 있자니 느끼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다.
그때는 내 새끼 이쁜 줄도 몰랐어. 사느라 바빠서..
어르신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다. 그 말씀 뒤에 남는 여운에 항상 마음이 쓰렸다. 언제까지 젊은 날일 줄 아셨을 테고, 아이는 아이대로 기다려줄 줄 아셨을 테다. 어느 순간 눈을 떠 바라보니 손은 이미 쪼글쪼글 푸석해졌고, 언제까지고 바라고 칭얼거리기만 할 것 같던 아이는 쑥 자라 내가 아닌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오래 지나 다시 만난 '아기'는 얼마나 반가왔을까. 손주를 이뻐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결국 자식에 대한 사랑일 테다. 그 지나간 시간이 항상 참 아쉬웠다. 아직 나의 것이 지나간 것도 아닌데도 참 아렸었다.
"우리 나중에 아쉽지 않게 지금 다 이뻐하자."
내가 신랑에게 했던 말이다. 나중에 아쉬워할 '지금'이라는 걸 알아서, 나중에 그리워할 '지금'이라는 걸 알아서 조금 더 진하게 지금을 살기 위해 애쓴다.
다들 참 부지런하고 열심히인 세상이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도태될 것처럼 겁을 준다. 성취와 결과만을 위해 과정에는 눈을 감는다. 앞만 보고 사느라 지금 발밑은 아무도 내려다보질 않는다.
게으르다는 말은 그리 긍정적인 이미지의 단어는 아니다. 당장 고쳐야 할 이상한 악습관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척결해야 할 국가적 재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그 게으름이라는 단어에 '엄마'라는 단어가 함께할 때는 더 가혹하게 평가된다. 엄마는 부지런해야 하고 엄마는 깔끔해야 하고 엄마는 희생해야 하고 항상 활력이 넘쳐야 하니까.
모두가 부지런히 일하고 한 톨의 여유도 없이 사는 이유도 결국은 언젠가 만나게 될 게으른 시간을 영위하기 위해서다. 주중에 열심히 일하는 것도 결국은 주말을 위해서고 낮시간 어려운 동료들만 만나는 것도 퇴근 후 내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게으름을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기에는 아무래도 너무나 매력적인 거 아닌가.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의 젊은 날도 기다려주지 않을 건 뻔하다. 그걸 몰랐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했겠지만 이미 수많은 어르신들의 의도치 않은 '스포'로 다 들어버렸고 알아버렸다. 사느라 바빠 나도, 아이도, 주변도 보듬지 못하고 지나치기엔 너무나 아까운 시간이다. 지금 한번 더 바라보고, 들여다 봐야 한다. 지금 한 번 더 손 잡고, 지금 한 번 더 안아주는 게 결국은 남는거다. 느리게 곱씹어가며 현재에 충실하는 것, 그게 나의 게으름이다.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는 말이 있다.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하고 자주 웃고 많이 웃는 사람이 이긴 거라는 말.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해본다. '게으름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마냥 나태하기만 한 못된 게으름 말고 지금을 사는 착한 게으름이 필요할 때다. 엄마가 조금 게을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원래도 게으른 사람이지만, 더 부지런히 게으르게 지금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