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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 Feb 07. 2020

15회 봉사활동: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

11년 차 유학생의 중국 적응기

15회 -봉사활동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

          

2011년 어느 한적한 오후, 베이징 오도구에 있는 spr카페 안


  나와 동심이 누나는 무엇을 하면 네이버 뉴스에 나올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항상 무언가 앞장서서 창조해냈던 동심이 누나는 항상 어떠한 단체를 창단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했는데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가 네이버 뉴스에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요리 단체나, 한중 교류 단체를 생각했었지만 동심이 누나는 봉사단체를 해야겠다고 했다. ‘봉사??? 내가 남을 도운다고? 남이 날 도와주어야 할판에? ' 나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워낙 동심이 누나가 무언가를 먼저 앞장서서 하는 스타일이라서 동희 누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뭔가 그녀는 확고한 의지가 있는 거 같았다.     


  동심이 누나의 계획은 꾀나 거창 했는데 중국 내 한국 유학생들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중국 고아원 봉사를 슬로권으로 내걸고 , 북경대 ,청와대 ,인민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회원들을 모으기로 했다. 나는 옆에서 총무를 맡기로 했다.

 

  일단 중국은 중국 학생들과 많은 외국인이 단체를 만들어 단체 행동을 하려면  관할 공안국이나 학교 측의 허가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을 위주로만 회원을 뽑기로 했다.  인민대학교에서는 중문과와 신방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고 청와대에서는 영문과 학생들이 추축이 되었다. 그리고 단체의 이름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뜻을 줄인 하람이라고 칭했다.      


  실은 나는 이 봉사 동아리가 성공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다들 배부른 유학생들이 뭐가 아쉬워서 봉사활동을 할까 생각 했다. 하지만 동심이 누나는 내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많을 수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동심이 누나의 긍정적인 마음을 앞세워 회원들을 모집했다.  나는 우리가 가는 중국 고아원이 중국 정부에서 인정된 고아원이었기 때문에 고아원 측과 이야기를 해서 나중에 봉사 증서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었다. 유학생들 특성상 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적어 취업할 때 장애요소가 된다는 것을 들었기에 그것을 미끼로 사람들에게 회원 가입을 유도했다. 나와 동심의 누나의 봉사단체에 대한 접근법 자체가 달랐지만 상관없었다. 우리의 목표는 성공 이였으니까!


  그렇게 모인 10명 남짓한 인원들... 이것도 지인들을 통해 모은 것이라 시작은 암담했지만 이왕 하기로 한 거 열심히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리의 활동계획은 이러했다. 각자 한 달 100위안(18000원) 활동비를 내면  조를 짜서 일주일에 한 번씩 고아원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까 고민을 하고 매달 마지막 주에 준비한 음식과 아이들과 놀아주기 위해 구상한 놀이들을 가지고  중국인 고아들과 놀아주는 것이다. 물론 준비물품과 아이들이 먹을 것은 우리가 낸 활동비에서 지출한다.     

  이러한 활동을 몇 달간을 걸쳐 진행이 되었고 고아원 측에서도 매우 흡족해했다. 나는 총무를 맡아서 각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매번 돈 계산과 예산 계획을 세우고 나면 남는 시간에 아이들에게 다가가 놀아주곤 했다. 솔직히 나는 어린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게 매달 가서 애들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정이 가곤 했다. 우리는 간식 전달 시간에 한국 치킨을 자주 자서  갔었는대 아이들이 그것을 참으로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달달한 한국 치킨이 아이들 입맛에 잘 맞았던 거 같다.     


그렇게 몇 개월 후...     


  점점 입소문이 났는지 네이버 뉴스에는 안 올랐지만 회원수가 100명에 가까워졌다. 북경대, 인민대, 청와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북경의 총 5개 대학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우리는 처음 2조로 5명 정도로 미약하게 시작한 것에 비해 나중에는 7조 12명의 인원과 임원진 몇 명으로 이루어진 나름 거대한 집단이 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선의로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은 나의 꼬임에 봉사 증서를 가지러 마음을 숨긴 채 온 친구들이 있었다. 뭐 그래도 다 상관이 없었다, 봉사를 하는 동안, 준비하는 동은 다들 열심히 성심성의껏 준비했다.     


  우리는 점점 동아리의 규모가 커지자 하나의 이벤트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고아원의 심장병 어린이들을 위해 수술비 마련을 해주는 것 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각자 우리가 얼마씩 걷어서 하는 것보다 음악회를 열어 진행하는 게 좋다고 임원진들과 상의를 했다.
 

  그럼 일단 음악회를 하기 위해선 공간이 필요했고 그에 따른 공간 대여료, 음악회를 진행할 수 있는 밴드나 댄스동아리를 섭외해야 했다. 우리는 기초자금을 모의기 위해서 헌 옷 바지회를 하면서 돈을 모으자고 결정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닫쳣는대, 안 입는 옷을 모으는 건 100명 정도의 구성원들이 있어서 상관이 없었지만 중국의 특성상 아무 데서나 허가 없이 바자회를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속한 관할 파출소에서는 불가하다는 연락이 계속 왔었고 이걸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은 인맥이라고 했던가? 다행의 아는 분의 도움으로 공안국의 동의를 얻어 북경 오도구에 있는 길거리에서 2일 동안 헌 옷 바자회를 했다.


  각자 포지션을 맡았다 몇 개의 조는  호객행위를 맡았고 몇 개의 조는  물건을 팔았다. 우리는 일심동체 해서 톱니바퀴처럼 움직였고 나는 몇 명의 총무팀 회원들과 들어오는 돈을 계산하면서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모은동 중국돈 4000위안(80만 원)과 기존 보유금 3000위안(55만 원) 정도로 공연장 대여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당시 헌옷 바지회때 사진

  그럼 이제 남은 건 북경안에 있는 한인 밴드나 재미있는 특색을 가진 동아리들을 섭외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과 술자리도 가져야 했는데 못 먹는 술을 먹어야 하니 곤욕이었지만 북경 술 대표주자인 동심이 누나와 몇 명의 아이들이 주(酒)님의 계시를 받았던 터라 확실히 섭외할 수 있었다.      


  음악회 당일에는 너무너무 바빴다. 음료수도 팔아야 했고 굿즈 작업물도 잘 관리해야 했고 밴드와 마술 동아리 등등 섭외한 동아리들도 챙겨야 했다. 아마 나의 기억으론 300명이 넘는 유학생들이 찾아와 준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하루 동안 입장비와 거기서 우리가 만든 굿즈와 음료값으로 18000위안(320만 원)을 모았다. 그리고 그걸 전부다 기부했다.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봉사한 일이었다.

  

  유학생들은 대부분 자신들만 아는 경향이 크다. 다들 어려서부터 홀로 타국으로 오기 때문에 조기 유학생이면 조기 유학생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홀로 살아남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고 남의 약점을 이용하는 점점 사람 자체가 정치적인 사람이 된다.  다들 우스개 소리로 국회의원에 진출하면 3선은 할 수 있다 라고 할 정도로 다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그렇게들 산다. 그런 이들이 봉사활동 증서를 따내기 위해서 이건 아님 따뜻한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든  혹은 인맥을 넒히러  왔던 결국엔 자신을 희생하고 시간의 시간을 쓰면서 남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나는 안다.


  나는 지금 또 누굴 위해 봉사할 수 있을까? 요즘 너무 힘들다. 공부 때문은 아니고 향수병 때문에 너무 힘들다. 중국에 있기도 싫고 한국에 가고만 싶다. 불안하다 누군가 나에게 봉사 좀 해줬으면 좋겠다. 정말 그런 기분만 드는 나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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