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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Jun 08. 2022

인생과 세상 인연을 그리다

드로잉은 인생과 비슷... 화려한 삶 뒤에는 어수선한 골목의 그늘이 있듯

취미로 드로잉을 배우기 시작했다. 드로잉 수업은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지하방 화실에서 받았다. 수업이 있는 목요일마다 접하는 문래동 사람들의 모습은 힘이 들어 보인다. 여지없이 입에, 또는 손에 담배를 물거나 들고 있다. 힘이 든 만큼 흡연의 달콤함으로 스트레스를 풀고자 함일거다. 


짙은 색상의 옷을 입고 텁수룩한 수염을 하고, 총총걸음으로 행하는 곳은 집일 테다. 삶은 울퉁불퉁한 길바닥처럼 불규칙하지만 가족의 힘으로 버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응원의 마음을 보내곤 했다.


어느 날, 드로잉 수업을 마치고 나오다 마주친 풍경은 이렇다. 부부인 듯, 닫힌 가게 문을 잠그고 있는 남편을 뒤쪽에서 안쓰럽게 쳐다보는 아내. 가게라고 해 봤자 어른 손바닥 크기만 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테니 작아도 부부한테는 큰 공간이다. 두 사람의 퇴근 길에 대고, 나는 마음 속으로 축복과 행운이 가득하기를 빌었다. 


문래동 거리에 있는 부동산소개업소의 유리창에는 건물 매매가가 몇 십 억에서 몇 백억 원이라는 A4 종이 몇 장이 나란히 붙어 있다. 문래동 사람들의 눈에 띈 들 누구든 선뜻 달려들 수 없는 금액이다. 녹록치 않는 인생의 그들에게는 화중지병과 다름없다. 누구를 위한 광고인지 씁쓸하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한 문래동 거리. 기름 냄새 진동하고 담배 연기만 피어 오르는 문래동은 인생의 거리와 닮아있다.


드로잉을 하면서 느낀 점이 많다. 스케치가 뛰어나다고 전체 그림이 훌륭하지 않다는 거다. 채색 과정에서 그림은 살아나거나 반대로 시들어 죽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드로잉을 할 때마다 채색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내가 드로잉을 할 때면 12색 물감을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색을 섞어야 채색에 어울리는, 적절한 색깔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과정이 언제나 어렵고 좀체 정립되지 않는다.


드로잉은 인생과 비슷하다. 화려한 삶 뒤쪽에는 어수선한 골목의 그늘이 있듯이 말이다. 그림 같은 인생에도 고뇌와 고통의 과정이 늘 숨겨져 있다. 그림을 그리는 진행 과정의 거듭됨이 작품을 만들어낸다. 숨을 쉬며 살아가는, 또 싸우고 달래는 과정과 과정의 집합체가 결국 인생인거다. 나에게 드로잉 수업은 인생 수업과 같다.


미완성은 완성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대로 끝난 게 아니다. 그래서 기대감을 내려놓지 않아야 한다. 뭐가 되든 작품 한 점이 탄생한다.


인생이 그렇다. 세월이 가면 삶에도 소소한 작품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명작이든 걸작이든 졸작이든. 모두가 자신의 작품들이다. 인생은 그림이다. 그리고, 인생 그림의 작가는 바로 자신이다. 거창하나 팩트다.

“내가 늙고 추해지고 고약해지고 병들고 가난해질수록 나는 더욱 멋지게 구성된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로 보복하고 싶다.” 빈센트 반 고흐의 말이다. 


이처럼 마음 속에 멋있는 그림을 그려보는 꿈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의 삶이든 그 결과는 그림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소도시에서 생활하다 보니 같은 노선의 시내버스를 자주 이용한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기사 아저씨 한 분과 유독 친해졌다. 서로 보통 이상의 인사를 하고, 오랜만에 만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며 걱정을 해 줄 정도다. 버스에 보관 중인 마스크를 내게 건네 주고, 갑자기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도 빌려 준다.


나는 가끔 직원 간식용 빵을 챙겨 버스에 오르면서 “출출하실 텐데 드세요!” 하면서 건네곤 했다. 요즘이야 코로나 때문에 손잡기도 그렇고, 입도 가려져서 눈인사를 주로 나눈다. 운전을 하면 알겠지만 강한 자외선(차단 유리라고 해도) 때문에 눈이 쉽게 피곤해진다. 거의 하루종일 운전하다 보면 더할 것이다.


집에 있는 스포츠 고글이 생각났다. 야구동아리 활동을 하는 아들 녀석 몫으로 샀던건데, 이미 한 개를 갖췄다고 해서 방치해 뒀었다. 기사 아저씨가 생각났다. 전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서랍 속에서 주인 없이 우두커니 누워있는 고글을 꺼내 가방에 챙겼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기사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자차를 이용하거나, 버스 운전 시간대가 달랐기 때문이다.


드디어 만났다. 한 정거장을 남겨두고 운전석으로 이동했다. 가방에서 고글을 꺼내 건넸다. 당황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이내 얼굴 전체가 웃음으로 번졌다.


“다음에 만날 때 고글을 쓰고 있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겠네요.”라고 말하고서 버스에서 내렸다. 총총 걸음으로 버스 진행 방향으로 걸어갔다. 버스는 출발하지 않고 서 있다. 운전석을 바라봤다. 버스 안에서 기사 아저씨는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나는 양쪽 엄지 손가락으로 응답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인연의 연속이다.


드로잉을 배우러 다니면서 문래동에서 만났던 사람들,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 나한테는 인연으로 그려진 사람들이다.


오늘은 또, 인생의 어느 날이다. 가끔 공격보다는 수비가 최상의 전략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사랑이 주저앉는 것도, 갈 길을 돌아가는 것도, 성공을 앞두고 짐을 싸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두고 누군가가 말했다. “인생, 그 모든 것은 쇼였어!”


하루 하루 인생의 연출을 잘 해야 한다.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공격보다 수비를 전략으로 내세울 때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습관적으로 뒤를 보는 것은 좋지 않다. 과거에 대한 미련과 후회의 반복으로 의욕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자신의 인생을 복기해보는 것은 다른 경우이다. 나도 가끔 인생을 돌아본다. 지난번 돌아본 인생은 이랬다.


용서를 해줬던 일보다는 용서를 받은 일들이 더 많았다. 감사(感謝)를 받았던 일보다는 감사를 표현했던 일들이 더 많았다. 인생이란 꽃과 같다. 피었다고 시들고, 또 피었다가 시들고, 반복하면서 세월은 두꺼워진다. 핀 꽃과 시든 꽃의 차이는 지금 기쁨을 주는 것과 과거 기쁨을 줬던 차이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지금을 바라보고 있어 과거에 대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래서 용서를 받았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감사를 말했던 일들도 잊어버린다.


용서했던 일보다는 용서를 받았던 일들을, 감사했던 일보다는 감사를 받았던 일들을, 우리의 기억에서 놓치지 않을 때 인생은 행복해질 것이다. 개똥철학 같지만 인생의 진리에 가깝다.


심리학에는 마음사회이론(Mind Society Theory)이 있다. ‘마음은 사회’와 같아서 여러 개의 ‘나’들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마음의 사회에는 선과 악, 미와 추 등 여러 것들이 하나의 몸을 사용하고 있다. 마음사회이론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음을 건강하게 한다. 


지금 내 마음에는 여러 개의 ‘나’들이 사는 마음사회가 있다. 여러 개의 ‘나’들을 개성으로 연출해 보는 것이다. 화(火)가 많은 나는 예술가로, 선하지 못한 나는 의인(義人)으로, 소외받고 억압받는 나는 정치인으로, 이렇게 마음의 사회를 만들어가다 보면 마음은 건강해진다.


먼저 예술가가 되어 인생을 그리고, 인연을 그려볼 것을 권한다. 무엇보다 자신과 인생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


법정 스님의 <인생 응원가>를 읽다가 이런 대목에 눈에 들어왔다. “가치의 척도는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모자란 것에 만족하는 삶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바로 모자란 것이 행복을 끌어오는 지혜가 된다. 세상의 인연은 끝이 없다. 인생의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바로 우리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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