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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Dec 21. 2021

작은 행복을 찾아서…

‘작은’ 눈물 한 방울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모두 잊어야 한다

또다. 벌써 한 해의 끝에 서있다. 돌아보면 항상 그렇다. 걷다가 뛰다가 멈췄다가, 앞길로 들었나 싶었는데 눈을 들어 보면 그 길목이었다. 웃다가 울다가 찡그리다가 행복의 길로 들어갔나 싶었는데 거울에 미친 얼굴을 보면 항상 그 표정이었다. 바라보다 올려보다 내려 보다가 남들보다 앞서니 뒤서니 싶었는데 동그랗게 둘러보면 바로 그 자리이었다.


과거는 잘 한 일보다 못 했던 일에 더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라도 ‘작은’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재미있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부사(副詞)의 변화를 지적한 내용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부사는 문장에서 없어도 그만 일 것 같지만 국어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용언(동사나 형용사) 앞에 놓여 뜻을 분명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번성하는 말, 쇠락하는 말을 보면 그 사회를 가늠할 수 있다. 특히 부사는 대중의 욕망을 읽어내는 지표다.

“근년 들어 ‘짐짓’ ‘무릇’ ‘사뭇’이 사라지는 중입니다. ‘몹시’나 ‘매우’는 좀처럼 안 쓰고, ‘너무’만 너무 많이 쓰고 있고요.”』


세상과 사회는 언어의 구사마저 ‘강한’ 어투로 변화시키고 있다. 신문 기사 속에서 김한샘 연세대 교수는 “강력한 수식어를 써 주장이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려는 경향이 짙어진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작은, 소소한 것들은 사라졌다. 억세고 격한, 강한 것들이 우리 곁에 서성이게 됐다. 올 가을, 나는 유난히 한 노래에 꽂혔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이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항상 통영의 중앙동 우체국이 생각났다. 청마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던 곳이다. 유치환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이영도는 연서(戀書) 200통을 골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는 서간집을 단행본으로 엮었다. 그 가운데 ‘행복’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정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러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통영의 우체국에서 작은 편지에 큰 사랑을 담은 시인은 얼마나 행복하였을까. 가을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붉은 단풍잎이 별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별과 비교해도 낯설지가 않다. 밤에 빛나는 별처럼 낮에 가을의 온 세상을 비춰주는 별과 같은 단풍잎이었기 때문이다. 가을의 단풍이 이처럼 큰 별이 될 수 있음은 작고 흔하기 때문이다.


작은 것은 꼭 그렇다. 별이 되진 못해도 별과 같은 ‘빛’을 내어 준다. 통영 우체국 앞에서 시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편지도 그렇다. “죽어도 행복했네”라지 않는가.


하늘은 하얗고 아침 공기는 차갑다. 울긋불긋 노랗고 빨간, 고동색을 띤 나뭇잎들이 요처럼 깔렸다. 그 위를 하얀 눈이 소북이 내려앉았다. 하얀 눈을 이불 삼은 나뭇잎들은 계절 내내 새로운 자양분이 되어 준다. 유치환의 ‘작은’ 편지가 그렇고, 가을 잎들의 ‘작은’ 희생이 그렇다.


지나가버린 인생은 늘 아쉽고 허전한 법이다. “내가 왜 살았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뇌이며 세월을 보내는 것은 인생의 비밀처럼 숨어있다. 이 비밀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밝혀진다. 그런데 사람들의 자꾸 ‘폭발적이고’ ‘충격적인’ 것들에 몰입하고 취하려 한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마음이 채이고, 그 상처를 혼자 무던히 견뎌낸다.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되지 않았는지, 전달이 됐는데 그 사랑의 힘은 이미 잊혀 졌는지, 노심초사다. 사랑의 실효는 무서울 정도로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그렇지만 사랑이 떠난 자리에 아주 크게 작은 불씨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런 희망으로 사랑을 끝내지 못하는 게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이다.


‘작은’처럼 좋은 말은 없다. 전혀 욕심을 내지 않는 단어다. 겸손하고 애틋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사랑스럽다. 우리는 이 단어를 잊고 살아왔다. 크고 강한 것에 천착돼 있는 인생이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말에 다이어리 한 권을 고르는 것은 작은 행복이다. 구세군 자선냄비에 동전 몇 닢 지폐 몇 장 넣는 것은 작은 실천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보며 커피 한 잔 나누는 것은 작은 평화와 같다.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성탄 카드 한 장 보내는 것은 작은 사랑이다. FM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작은 문화이다. 저녁밥상 위에 아내의 손끝에서 올라온 초근목피(草根木皮)는 작은 만찬이다. 어깨 부딪치며 살아가는 공간은 아늑한 작은 호텔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바라는 것은 우리네 작은 꿈이요, 마라톤 같은 인생인데 숨을 고르면서 느린 걸음을 내딛는 것은 작은 항해이다.


작은 것들이 모여 행복은 만들어진다. 냇물이 흘러 강물을 이루고, 강물이 흘러 바다를 이룬다는 이치와 같다. 큰 것에 대한 집착은 마음 비만의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한다. 비만의 질병이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년에 발표한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는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말이다.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작가는 이런 것들을 소확행이라고 했다.


연말이다. 새해가 목전(目前)이다. 마음을 먼저 살피고, 생각 속에 만들어 놓은 굴곡과 굴레를 벗어나야할 시점에 있다. 아무도 굿판을 펼치지 않는, 눈에 보이는 큰 무당도 없다. 우리 스스로가 굿판을 펼쳐 맺힌 걸 풀고 가야 하는 시간이다.


삶은 바람처럼 일방향이다. 집착과 욕심은 아픈 인연일 뿐이다. ‘작은’ 눈물 한 방울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모두 잊어야 한다.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처럼 우리의 “쇼는 계속 되어야 하기(The Show Must Go On)”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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