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계획의 두 얼굴

법정계획과 비법정계획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

by NaeilRnC
fbb280c5-5d15-47d8-a583-dc729ca7a75d.png 법정계획과 비법정계획의 차이


배경 : 지역개발 일을 하다 보면 “이 계획은 왜 해야하나?”라는 질문이 가끔 따라붙는다. 겉으로 보기엔 비슷한 ‘계획’인데 어떤 것은 반드시 수립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처럼 취급된다. 이름은 모두 계획인데 행정에서 그 무게와 위상은 전혀 다르다. 그 기준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법률에 근거가 있는 계획인지, 행정이 필요에 따라 자율적으로 만드는 계획인지의 차이이다. 이번에는 행정계획의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법정계획과 비법정계획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 행정계획에도 법적 위계가 있다

행정에서 말하는 계획은 단순한 일정표나 내부 업무계획이 아니다. 특히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수립하는 중·장기 계획은 앞으로 몇 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정책과 예산, 개발 방향을 이끌어가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 계획들 중 일부는 법률에 의해 수립이 강제되어 있고, 일부는 각 기관이 필요에 따라 자율적으로 만든다. 전자를 법정계획, 후자를 비법정계획이라고 부른다.


이 둘의 차이는 매우 명확하다. 법정계획은 어느 법 몇 조에 근거해서 누가, 언제까지, 어떤 절차를 거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다. 반대로 비법정계획은 그런 규정이 없다. 필요하면 만들고, 필요 없다고 판단하면 만들지 않아도 된다. 수립 여부와 방식, 주기가 모두 행정기관의 재량에 달려 있다. 같은 “종합계획”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도, 하나는 법에 근거한 의무계획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 판단에 따라 수립하는 자율계획일 수 있다. 그래서 행정계획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계획이 법적 근거를 가진 것인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 법정계획은 법률이 요구하는 계획이다

법정계획의 가장 큰 특징은 법률에 “수립하여야 한다”라는 문구로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국토종합계획은 국토기본법에, 국가균형발전계획은 국가균형발전특별법에, 도시기본계획과 도시관리계획은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근거가 있다. 환경정책기본법에는 환경기본계획이,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에는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이, 물관리기본법에는 수자원장기종합계획이 각각 규정되어 있다. 분야는 국토, 교통, 환경, 복지, 고용, 보건, 농어촌, 산업 등 매우 넓다.


이 계획들의 공통점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수립 주체가 명확하다. 어느 부처 또는 어느 지자체가 책임지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가 법에 적혀 있다.

2. 수립 주기가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5년마다 또는 10년마다 수립해야 한다는 식으로 기한이 규정된다.

3. 절차가 규정되어 있다. 관계 기관 협의, 공청회, 주민 의견수렴, 국회 보고, 위원회 심의 등 어떤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다.

4. 상위·하위 계획과의 연계가 요구된다. 국토종합계획과 광역도시계획, 도시기본계획과 관리계획이 서로 정합성을 가져야 한다는 식이다.


이 때문에 법정계획은 행정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계획”이다. 계획이 없으면 법 위반이 될 수 있고, 계획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감사나 평가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법정계획은 행정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며, 국가와 지자체의 중장기 방향을 규정하는 일종의 골격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 비법정계획은 행정이 스스로 만드는 계획이다

비법정계획은 법률에 수립 의무 조항이 없는 계획이다. 다시 말해 “이 계획을 수립하여야 한다”라는 문구를 갖고 있지 않은 계획을 뜻한다. 여기에는 중장기 종합발전계획, 관광종합발전계획, 읍면동 발전계획, 생활SOC 복합화 계획, 도시브랜딩 전략 등 지자체가 필요에 따라 만들어내는 각종 전략계획이 포함된다.


이 계획들은 법적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수립 여부는 전적으로 지자체의 판단에 달려 있다. 어떤 지자체는 종합적인 지역 비전을 담은 10년짜리 종합발전계획을 정교하게 만들어 운용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여건상 간단한 전략계획 수준으로 정리해 두기도 한다. 계획의 형식, 구체성, 내용의 범위 등도 지자체마다 차이가 크다. 법에서 정해준 틀이 없기 때문에 지역의 특성과 필요에 따라 훨씬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만큼 한계도 뚜렷하다. 법정계획은 수립 자체가 의무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 계획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비법정계획은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쉽게 생략될 수 있다. 예산도 마찬가지다. 법정계획에 담긴 사업은 대개 국가나 지자체 재정계획과 직접 연결되는 경우가 많지만, 비법정계획의 사업은 담당 부서의 의지와 내부 설득력에 따라 예산 반영 여부가 좌우된다. 단체장이 바뀌거나 조직 개편이 이루어지면 계획의 위상이 바뀌거나, 아예 새로운 이름으로 교체되기도 한다.


□ 헷갈리기 쉬운 계획들

현장에서 자주 혼동되는 부분이 바로 “이 계획이 법정인지, 비법정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도시재생과 관련해서는 도시재생 활성화계획이 도시재생특별법에 규정된 법정계획이지만, 어떤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수립하는 도시재생 전략계획이나 도시재생 비전계획은 비법정계획인 경우가 많다. 농어촌 분야에서도 농어촌정비기본계획은 농어촌정비법에 근거한 법정계획이지만, 개별 군 단위에서 수립하는 농촌마을 발전계획이나 읍면 단위 종합계획은 대부분 비법정이다.


관광 분야 역시 비슷하다. 문화도시 조성계획처럼 법률에 근거한 계획도 있지만, 각 지자체가 통상적으로 수립하는 관광종합발전계획이나 관광활성화 전략계획 등은 대개 비법정계획으로 운영된다. 이름만 보고는 법정·비법정을 구분하기 어렵고, 같은 분야 안에서도 어떤 계획은 법정, 어떤 계획은 비법정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국 근거 법령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 중장기 종합발전계획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기초자치단체 실무에서 자주 등장하는 계획이 바로 “중장기 종합발전계획”이다. 이름만 들으면 마치 상위법에 의해 정해진 필수 계획 같지만, 실제로는 어느 개별 법률에도 “중장기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군·구는 자체 조례나 내부 방침에 따라 이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중장기 종합발전계획은 법적으론 비법정계획이지만, 내용의 범위로만 보면 오히려 가장 포괄적인 성격을 갖는다. 인구, 경제, 산업, 복지, 교육, 문화, 환경, 공간구조, 교통, 재정 등 지역의 거의 모든 분야를 한 번에 조망하고, 향후 5년 내지 10년 정도의 비전과 전략을 묶어내기 때문이다. 이 계획이 잘 수립되면 개별 부서의 개별사업이 아닌, “지역 전체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기준점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이 계획을 단순한 형식으로만 만들면, 많은 예산을 들였음에도 실제 행정에는 활용되지 못하는 문서가 되기도 한다.


법적으로는 비법정계획이지만, 실무적으로는 다른 법정계획과의 관계를 조정하고, 부서 간 중복을 줄이고, 예산의 우선순위를 정리하는 “조정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중장기 종합발전계획을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하느냐에 따라, 그 지자체의 정책 일관성과 실행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 계획의 이름보다 먼저 봐야 할 것

결국 행정계획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이다. “이 계획은 법률에 근거한 의무계획인가, 행정이 필요에 따라 스스로 만든 자율계획인가.” 그에 따라 계획의 법적 무게, 예산과의 연결 정도, 행정의 책임 범위가 달라진다. 법정계획은 국가와 지자체가 반드시 책임져야 하는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는 틀이며, 비법정계획은 그 틀 안팎에서 지역의 현실과 특수성을 반영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두 계획 모두 역할이 있다. 법정계획이 행정의 골격을 만든다면, 비법정계획은 그 골격 위에 지역의 색과 디테일을 입힌다. 다만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 채 “계획이 있으니 다 된 것처럼” 이야기하면, 정작 중요한 법적 위상과 실행력에 대한 논의는 빠지게 된다. 행정계획을 다룰 때는 언제나 이름보다 먼저, 그 계획이 서 있는 법적 자리를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법정계획과 비법정계획을 구분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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