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연구용역의 세계

누구보다 치열한 사람들이 사는 공간

by NaeilRnC

배경 : 연구용역 일을 한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열심히 준비한 제안서를 직원이 열차에 놓고 내리는 바람에 입찰조차 못 한 적도 있었고, 이미 ‘내정’됐다고 알려진 용역을 실력만으로 뒤집어 얻어낸 적도 있었다. 이번 글은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롯데월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예측할 수 없고 인간적인, 연구용역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 짜고치던 고스톱에도 변수는 있다.

대부분의 연구용역은 나라장터에 공고된 절차를 따라 움직인다. 발주기관이 제안요청서와 과업지시서를 올리고, 업체들은 그 요구사항에 맞춰 제안서를 만든다. 예전에는 이 과정에서 업체 간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르다. 공고가 올라오기 전부터 사실상 ‘정해지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가끔 오해가 생긴다. “그럼 불법 아니냐, 민원 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반응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건 불법이나 편법이 아니라, 이 업계의 구조적 특성과 효율성, 그리고 ‘형평’의 관점이 함께 작동한 결과라는 것을 이 세계를 오래 본 사람이라면 안다. 연구에는 ‘1차–2차–3차’처럼 이어지는 연속 사업이 많다.

1차를 A가 맡았는데 2차를 B에게, 3차를 C에게 맡기면 연구의 연속성·심층성·데이터의 일관성이 모두 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박스를 하나씩 주는 ‘평등’보다는, 상황에 맞게 다른 박스를 주어 실질적 결과를 만드는 ‘형평’이 더 중시된다.


정책 연구는 특히 그렇다. 연구자의 전문성, 해당 지역에 대한 이해, 데이터 축적 과정은 ‘같은 기회’만으로는 대체될 수 없다.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오히려 공공의 효율성과 책임성에 더 가깝다. 물론 A가 기대보다 현저히 부족하다면 B로 변경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 기준 없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석·박사로 꽉 차 있는 공간이라 전문가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평가, 견제, 자체 정화 과정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외부에서 보면 “짜고 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은” 아주 복잡한 균형 위에서 돌아간다. 즉, 형식적 평등보다 실질적 형평, 명목상의 기회균등보다 성과의 효율, 표면적 절차보다 연구의 깊이와 연속성이 더 중요한 세계가 바로 연구용역이다.

download.png <출처> https://ssam.teacherville.co.kr/ssam/contents/7235.edu


□ 연구는 결국 사람의 일이다

그리고 이 복잡성 속에서 가장 까다로운 주체는 공무원도, 연구기관도 아니다. 바로 현장 주민이다.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OO마을은 오랜 기간 농촌활성화 사업을 추진하며 놀라울 만큼 높은 역량을 쌓은 마을이었다. 지역주민들이 생산한 쌀로 누룽지 공장을 직접 운영하며 마을 수익을 만들어본 경험 덕분에 행정 지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실제 도움이 되는지 주민들이 공무원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추진위원장이다. 여러 리(里) 단위가 모인 지역일수록 이장들 간 갈등을 피하기 위해 추대나 추천으로 추진위원장을 세운다. 문제는, 이들이 사실상 선출직만큼 강한 권한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무리 제안서를 잘 써도 추진위원장이 “NO”라고 하면 방법이 없다. 행정도, 연구진도, 주민들도 모두 그 말 한마디를 피할 수 없다. 연구는 결국 논리나 이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관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 마을에서 다시 한번 배웠다.


나는 이 지역의 용역을 수행하면서 영화 대사처럼 "술도 먹고, 송어회도 먹고, 다 했다" 하지만 추진위원장은 우리 회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니 잘 알지만 밝힐 수 없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진위원장이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었던 그 업체를 결국 이기고 용역을 따냈었는데 그때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용역금액보다 결국 나의 설득이 통했기 때문이고, 나의 진심을 추진위원장이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연구용역의 세계는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더 사람냄새가 진하다. 형식보다 맥락, 절차보다 신뢰가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 세계의 복잡함이 때로는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 복잡함이야말로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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