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많은데 지역이 바뀌지 않는 이유
배경 : 지역개발을 하다 보면 가장 의아한 순간이 있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계획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정작 지역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행정은 매년 새로운 계획을 만들지만, 그 계획이 가진 ‘무게’와 ‘위상’을 고려하지 않는다. 결국 예산을 쓰고 보고서를 만드는 과정은 남지만, 실행은 부재한 채 사라지는 일들이 반복된다. 오늘은 행정계획이 왜 실패하는지, 구조적으로 어떤 문제가 누적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법정계획인 중장기 종합발전계획(이하 ‘종발’)은 통상적으로 지방선거 전(Before) 또는 후(After)에 많이 만들어진다. 선거 전에 만드는 종발(Before) 은 단체장이 공약을 설명하는 레퍼런스용으로 쓰인다. 전략이라기보다 ‘홍보용 청사진’의 성격이 강하다. 선거 이후 만드는 종발(After) 은 새롭게 선출된 단체장의 의지가 반영돼 실제 사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따라서 행정적으로 실효성이 있는 종발은 대부분 A시점의 계획이다.
문제는 최근 지방정치의 흐름 때문에 많은 지자체들이 선거 전 종발(B) 을 굳이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권교체나 단체장 교체가 반복되면서 “어차피 바뀔 텐데”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다시 당선되더라도 비법정계획은 언제든 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종발을 발주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최근 몇 년 사이 종발 발주 건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대신 읍·면·동 단위의 소규모 계획이 이름만 달리한 채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계획은 넘치는데 실현되는 정책은 없을까?
한국의 지방정부들은 매년 수십 개의 계획을 생산하지만 대부분 실현되지 않고 행정의 책상 위에서 소멸을 기다릴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계획을 양산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일종의 산업이 되어버렸기 떄문이다. 구조화된 행정계획 산업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비법정계획은 정치적 리스크가 없다. 실패해도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자체는 눈에 띄는 기획을 양산하며 ‘일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둘째, 행정조직은 계획을 성과로 오해한다. 계획을 만들었다는 것을 문제를 해결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계획은 종종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적 면죄부” 역할을 한다. 셋째, 단체장의 홍보정치가 팽창한다. 계획을 수립하면 보도자료를 낼 수 있고, 번지르르한 비전이 담긴 책자를 만들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비법정계획은 홍보물처럼 소비된다. 결국 지자체는 ‘계획 과잉–실행 부재–책임 없음’의 악순환에 빠진다. 이 구조는 개별 공무원의 의지로는 벗어날 수 없는 시스템적 문제다.
종발은 한 건당 최소 1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하지만 실행예산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1억 원은 사실상 보고서구입비와 다르지 않다. 이 낭비를 줄이기 위한 첫 출발점은 국민 스스로의 인식 변화다.
"내가 너희 월급 주는 사람이다" 갑질민원에 대표적인 대사다. 그런데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공무원의 월급을 줄만큼 세금을 많이 내는 개인은 몇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못배운 '주인의식'을 아무데서나 남발한다. 주인의식을 버려야한다. 우리는 행정의 고객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구성원이고 주인이 아니라 책임의 일부를 함께 나누는 파트너다. "손님이 왕이다"라는 말은 스위스 출신의 호텔리어인 세자르 리츠(César Ritz)가 "손님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Le client n'a jamais tort)"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는데 당시 호텔이용객은 실제 왕족이나 귀족이었다.
행정이 책임을 회피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주인의식보다 감시자로서의 역할, 감시자보다는 공동정책 설계자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