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돈 먹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이른 아침. 원래 이맘때면 국장님이 오셔야 하는데 오늘은 오질 않으신다.
나와 팀장님 둘만 덩그러니 사무실에 앉아있었는데 나의 근무평가가 궁금해서 용기를 냈다.
"팀장님, 제가 요새 꿈에 험한 게 보여서 그러는데, 속 시원하게 결과를 알려주세요"
"ㅈㄹ, 야, 너 그냥 다니면 돼"
(아, 왜 팀장님이 반말을 하시는지 궁금하시죠? 제 중고등학교 선배님이십니다.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콩알만 한 동네에서 같은 중고등학교 나왔으면 뭐 동네형이나 다름없습니다.)
순간. 기쁨보다는 '뭐... 이렇게 갈아대는데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체념인가 싶을 정도로 전혀 기쁘지 않고 무덤덤했다. 그리고 그럭저럭 오늘은 일기보다 다른 주제로 뭔가를 해볼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등장한 국장님 때문에 나에게 열기가 솟아났다.
국장님의 등장이 예전 '우주삼총사'가 맨날 외치던 '초자력 충전'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두근두근 울렁울렁 오늘은 또 나에게 뭘 던지려나...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나의 PC가 갑자기 멍을 때리며 3시간 동안 작업했던 계획서가 퓽하고 사라졌다.
아, 비상. 뭔가 쎄하다...이건 역대급 신호다. 보통 '마구니데이'는 아침 일찍 찾아오는데, 왜 하필 이때 나에게 이런 시련이... 그때! 국장님이 다와가 내게 통보했다. 오늘 저녁 같이 가자!
오늘 저녁의 자리는, 업무회의를 가장한 회식자리였고 우리는 그들의 회식을 계산하러 가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런 류의 회식계산에는 회의를 가장한 사진, 회의를 가장한 회의사진, 회의를 가장한 회의록 작성 등 잡일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차출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접대를 해야 하니까...
순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저, 오늘 할 일이 많아서... 죄송합니다"라는 소리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아, 얼마나 가기 싫었으면... 나의 ID가 EGO를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국장님의 대답이었다.
"그래? 그거 내일 해"
'뭐? 아놔...어쩌라구?'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올 뻔했다.(아, 정말 인생에서 역대급으로 잘 참았다.)
그러다 본인이 좀 심했다고 느꼈는지 내 옆에 있던 '그놈'에게 '너도' 같이 가자고 말을 걸었다.
그런데, 역시 콩가루집안의 셋째 아들 다운 '그놈'은 진작에 눈치를 까고 "저도 가고 싶지만..."으로 시작해 "내일까지..."를 거쳐 "죄송합니다"로 끝나는 멋진 연설을 시전 했고, 결국 내가 끌려갔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국장님은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자리 잡으셨고, 난 자연스럽게 중앙에 배치되었다.
'고기는 니가 구워'라는 무언의 압박. 그리고 사람들이 슬슬 모이자 국장님이 눈치를 주셨다.
'아직 고기가 셋팅되지 않았으니, 돌아다니면서 서명부에 싸인을 받고, 사진도 찍고, 그리고 다시 돌아와 앉아서 고기는 니가 구워'
술병이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나야 했기 때문에 나는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서명을 받고, 사진을 찍어댔다.
본격적인 회식이 시작되었고 음식이 나왔다. 술이 나왔고, 돌아가면서 건배를 해댔지만 나는 고기 굽다가 잔을 들고, 고기 굽다가 잔을 들고, 다 익은 고기는 귀빈들의 접시에 한 접씩 놓아드려야 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난 고기를 구워야 했기 때문에 듣질 못했는데, 국장님이 나를 쳐다봤다.
'고기를 굽다가 누군가 말을 하면 받아 적어야지! 이 쌔끼...고기만 굽냐'라는 표정.
순간 뭐라도 적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다시 잔을 들어야 했다.
하... 많이 먹으라는 소리를 할 거면 니 접시에 들어있는 그걸 좀 나눠주던지... 말로는 천냥빚도 다 갚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또 국장님이 나를 쳐다봤다.
'뭐 하냐? 계산해야지?'라는 표정.
계산을 위해 카운터로 갔는데, 예산을 훌쩍 오버한 금액을 불러줬다. 하긴, 술을 30병을 부어댔으니 술값만 얼마야... 일단 가용금액만 카드로 긁고 잠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팀장님이 나오셨다.
"많이 먹었어?"
"예?"
순간, 내 귀를 의심하며 '뭐래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뒷말이 더 짜릿했다.
"야, 좀 먹으면서 하지 그랬어!"
"아, 예... 저 그래도 오늘 야근수당 값은 벌었네요."
"야, 다른 애들은 일하고 있는데 넌 고깃집 와서 밥 먹으면서 야근수당까지 신청하려고?"
순간, 할 말이 없었다. 남의 돈 쓰기를 이렇게 쉬운데, 남의 돈 먹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뭐, 모르던 바는 아니었지만 오늘 꽤 심한데? 문제는, 이걸 내일 정리해서 가짜 회의록이 나와야 한다는 거다.
오늘 나는 이렇게, 저녁의 꿀 같은 시간을 날리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야근수당도 못 받는 헛짓의 절정을 맛보았다. 캬! 오늘 고기맛 증말 달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