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때 내장산에 간 적이 있는데 달력 그림에 나온 것처럼 너무 예뻤어. 지금까지 그렇게 예쁜 단풍은 본 적이 없어. 너무 오래전이라 내가 본 단풍이 진짜였는지 꿈에서 본 건지 헷갈린다."
70대를 눈앞에 둔 엄마는 가을만 되면 내장산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에게 단풍 여행이란 중년의 여행이란 느낌이 강해서 끌림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기억 속 내장산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엄마의 계절'이었다.
# 여행 제1원칙, 새로운 것이 보인다면 한 번쯤 멈춰보기
내장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주변으로 깃발이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익산에서 국화 축제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화 향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렀다 가기로 한다. 그래서 보게 된 익산 천만 송이 국화 축제.
축제 이름답게 천만 송이는 훨씬 넘어 보이는 국화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지역 축제면 으레 볼 수 있는 지역 농산물 장터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었다. 국화향을 맡으며 국화차를 마시는 것도 계절을 만끽하기에 그만이었다.
엄마는 국화차, 인절미, 생강청 등 크리스마스날 선물 받은 아이처럼 양손 가득 사들고도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뒤들 돌아보셨다. 미쳐 못 산 물건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아니면 잔향 가득 남은 국화꽃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익산 천만송이 국화축제( 매해 10월 말경 열린다.)
# 여행 제2원칙, 여행 친구의 취향을 고려한 동선 짜기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대부분의 일정에 아이들의 취향을 고려하게 된다. 이번 여행의 VIP 여행친구는 엄마였다. 엄마만을 위한 여행은 처음이었다. 가족여행에서는 늘 아이들이 우선이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번엔 엄마의 취향이 가장 우선이었다. 우리 엄마는 홍시, 식혜, 꽃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무엇을 좋아하지?
여행은 여행 친구의 취향을 발견하게 한다. 이번에 난 엄마의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습관적으로 카페인을 수혈해야 하는 우리 모녀를 위해 카페를 가기로 했다. 국화 축제 방문 후 근처 카페를 찾다 발견한 '고스락'
카페 이외에도 정갈한 한정식집도 운영되고 있었다. 진작 알았다면 식사도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식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산책을 나서본다. 고스락은 카페라기보다는 작은 수목원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다. 정원 내에 작은 연못과 오리, 거위 등도 볼 수 있어 중학생 아들들도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나이의 시간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엄마의 시간은 빨리 흘러가고 있었다.나는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에서 여행 친구의 빨라진 시간을 발견하게 됐다. 엄마는 30분 정도 걸으면 잠깐 앉아서 쉼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군데군데 야외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 산책하기 불편함은 없었다.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여기저기 놓아둔 빨간 우산에서 주인장의 따뜻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었다.
엄마 취향 저격, 작은 수목원같은 '고스락'카페
# 여행 제3원칙, 내가 좋은 시간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다. 종이 반장만큼만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붐비는 시간 피하기
한가하게 좋은 것을 즐기는 여행은 누구나 바라는 바다. 하지만 누구나 가고 싶은 유명한 여행지는 그만큼 사람이 몰리기 나름이고 느긋하게 즐기는 여유 따위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종이 반장만큼 부지런해지는 일.
내장산을 오는 것이 망설여졌던 이유는 수도권에서 오기에 소요시간이 길다는 것 이외에도 단풍철 교통지옥이 펼쳐질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숙소를 매표소 바로 코 앞에 예약했다. 이른 아침 내장산 개장 시간에 맞춰 붐비는 시간을 피하기로 계획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개장하기 전부터 입구는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설악산에 갔던 동료가 설악산 입구에서 되돌아왔다는 전설 아닌 전설은 허언이 아니었다. 우리는 내장산 입구까지 걸어서 1분 컷인 덕분에 편안하게 단풍을 즐길 수 있었다.
"엄마, 기억 속에 그 풍경이 맞아?"
"아니, 기억 속의 그 단풍보다 오늘이 더 예쁘네."
엄마가 국화꽃보다 더 환하게 미소 지으셨다. 이제 엄마의 내장산에는 우리 가족이 함께 있다. 붉게 물든 엄마의 계절이 더 선명하고 오래 계속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