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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테리 May 17. 2021

졸음의 흑역사

그 곳이 어디든 상관 없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하나님!! 잠깐 졸은거 같은데,

 그래서 여기가 지옥인가요?”    


과유불급의 표본이 되는 것.

삶에 있어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게으름과 무기력의 척도가 되는 것.

바로 잠이다.    

어렸을 때부터 잠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참 잘 자는 아이였다.


고3 때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학업을 포기한 학생은 아니었다.여전히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야심 가득한 학생이었다. 독서실 책상 위에 “인간의 수면 시간은  4시간이면 충분하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깨어 있으면 꿈을 이룬다.” 따위의 슬로건을 써붙여놓고  

때로는 집중이 안 되어서, 때로는 식곤증으로, 때로는 감기약 탓인지 다양한 자세로 잘도 잤다. 수업 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절대 대한민국의 입시 체제에 저항하는 학생이 아니었음에도 1교시에 잠깐 졸다 깨어났는데 점심시간이라 스스로 놀란 적도 있었다. 시험공부 한답시고 엄마가 타준 다방 스타일의 냉커피를 원샷하고도 눈이 스르륵 감겨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잠을 참고 3-4 시간밖에 못 잔 날은

어김없이 학교에서 모자란 수면 시간을 채웠으니 나는 절대적으로 7-8 시간은 자야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인자를 타고난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었다. 아니 어쩌면 시간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영면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수험생이라서, 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대학을 가서는 더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졸았다.

지하철에서 깜빡 졸아 내려야 할 역을 한참 지나는 것은  흔한 일상의 루틴이었고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으로 소주를 마신 날은 집 근처 건널목 가로등 앞에서 곤히 잠든 나를 지나가시는 아주머니께서 흔들어 깨워주셨던 적도 있다.

무려 4년을 짝사랑했던 첫사랑이랑 영화를 보던 와중에도 졸아서 그녀의 마음을 삐치게 한 적도 있었다. 이쯤 되니 내게는 졸음이 의지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것이 되었다. 기면증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에스테틱에서 피부관리를 받을 때도 등을 대는 순간 잠이 들어 몇 년 동안 다닌 샵 실장님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고 친구들이랑 클럽에 놀러 가서도 새벽 2시가 넘어가면 대형스피커 앞에서도 전혀 당황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꿀잠을 잘 수 있는 아이였다.

한번은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놀다가 귀가하는데

적색신호에서 대기하다가 운전대를 잡은 채로 잠이 들어

움직이지 않는 차를 기이하게 여긴 누군가의 신고로

출동한 친절한 경찰분께서 졸음운전은 위험하다며 대신 집까지 대리운전을 해주신 적도 있다.


사실 음주운전보다 더 위험한 것이 졸음운전인데

알면서도 졸음 앞에는 매번 장사 없었다.


예전에 사극을 촬영했을 때의 일이다. 매니저가 없었기에 나는 자가로 운전하며 촬영지를 이동했는데 지금이야 제작 여건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밤샘 촬영 당연시되던 때라 잠 한숨 못 자고 밤샘 촬영 후 또 2~3시간을 이동해 촬영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있었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음악의 볼륨을 한껏 높여가며 운전을 해보아도 눈꺼풀은 더는 감내할 수 없는 무게의 바벨을 마주한 역도선수의 눈처럼 감기고 있었다.

어떤 꿈을 꾸었다. 긴 꿈에서 깨어나듯 눈이 떠졌다.

차가 아무렇지도 않게 기나긴 트럭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잠시 후에 또 다른 꿈을 꾸었다. 구제 불능 졸달(졸음의 달인) 이었다.


여행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LA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편이었는데 중간에 경유를 한번 했다. 꽤 오랜 시간을 대기해야 해서 식사도 하고 쇼핑도 하고 대합실 의자에 앉아 책도 읽고 하다가 잠깐 졸았는데 나의 잠깐은 세상의 잠깐과는 시차가 상당해서 내가 깨어났을 때는 비행기가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세상에…. 지하철도 아니고, 버스도 아니고, 비행기를 다 놓쳐 보네….  결국 대합실에서 추가 수면을 하고 다음 날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여기서가 끝이라면 쓰지도 않았다.


내가 진정한 졸달로 등극하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 있다.

군대 입대했을 때의 일이다.  해군홍보단이라 특수부대(?)에 지원한 나는 훈련소에서의 시간을 마치고

4명의 동기와 함께 자대가 있는 호남선 ktx에 몸을 실었다.

담당관이 뒤늦게 예매했는지 좌석이 서로 다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복선이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식당에서 마지막 만찬을 함께하고는 자리로 돌아와 의심의 여지 없이 잠들었다. 내게 있어 등받이는 잠이 들라는 최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동기들이 깨워주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의 대가는 잔인했다. 아니 잔혹했다. 무언가 스산한 느낌에 눈을 뜬 나는 무심결에 창문 밖을 바라봤고

창밖의 풍경은 네 명의 동기들이 군용 배낭을 짊어 멘 채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음,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들이 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지?’ 그 와중에도 상황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마치 나와 작별하듯이

분주하게 손을 흔들었고 기차는 내가 내릴 틈도 주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


‘X 됐다.’


예쁘고 고운 말을 사용해야겠지만

때로는 그런 단어만으로는 느낌을 살려낼 수가 없다.

그제서야 사색이 된 나는 다급하게 승무원분에게 나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기차는 마치 군사작전을 수행하듯

원래는 정차하지 않는 역에 나를 은밀히 내려 주었다.

해군홍보단 사상 유례없는 입대 전 탈영과도 같은 이 사건으로 나는 자대배치 첫날부터 묵직한 임팩트를 심어주게 되었는데 밤에 짐을 풀면서 한 번 더 경악해야만 했다. 급하게 짐을 챙겨 내리느라 다른 의장대 사람 배낭을 잘못 갖고 내린 것이었다. 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이 글을 빌어 그때 아무 죄 없이 배낭이 바뀌어 당황했을 이름 모를 의장대분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

이렇게 졸음으로는 두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의 흑역사를 자랑하는 나이지만 불면보다는 숙면이 축복이라 믿는 긍정적 비관주의자이다. 잠을 줄여야 성공한다고 하지만 잠을 자야 살아낼 수 있다.     


PS.“최고로 멋진 일은 자는 것이다. 최소한 꿈을 꿀 수 있기에.” -마릴린 먼로-    


PS. 먹는 브런치, 쓰는 브런치 둘 다 좋아합니다.

쓰는 브런치는 피가 되고, 먹는 브런치는 살이 됩니다.

이제 돈이 되는 브런치만 찾으면 되는데….

이생망이 아니라 믿으며 글을 쥐어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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