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 채식주의자를 읽고.
“음식을 골고루 잘 먹었으면 그렇게 안 아팠을 거라니까? 장담할게. 그러니까 고기 좀 먹어라.”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을 끌고 회사로 향했다. 코로나 검사가 음성이라는 연락을 받고 나서 회사로 출근하니, 선배들이 온갖 이야기를 쏟아낸다. “무슨 병 때문에 그렇게 아픈 거냐”, “장염이 뭐 그렇게 심하게 오냐”, “생야채를 그렇게 많이 먹으니 몸에 기력이 없어서 그렇다”... 회사에 있었던 이십 분 남짓 동안 들었던 모든 얘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하나였다. “채식이 몸을 망쳤다.”
영혜 역시 숱하게 공격받았다. 남편으로부터, 남편 회사의 회식 자리에서, 그리고 가족들로부터 말이다. 소수에게 폭력을 가하는 다수의 모습은 익숙하다. 전복 시도를 원천 차단하는 것은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전략이니까. 그럼에도 영혜는 굴하지 않는다.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오히려 점점 더 음식을 먹지 않는다. 폭력을 거부하는 영혜의 진정성은 죽음을 통해 피로 얼룩진 꿈에서 벗어남으로써 완성되었다.
반면 나의 진정성은 초라했다. 여러 차례 공격이 이어지자, 정말 채식을 해서 몸이 약해진 건 아닌지 자신을 의심하게 됐다. 심지어 회식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자, 다음 날 몸이 나아졌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자괴감이 엄습했다. 자그마한 가치관 하나 실현해보려는 시도였는데, 다수는 그것을 ‘비정상’으로 규정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수 폭력을 내재화하고 있었다.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대로 백래시에 항복할 건가? 포기하면 마음은 편할 테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내 자아는 분열 상태와 다름없다. 이제는 분열된 자아가 아니라, 온전하고 일관성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죽음으로 승화시킬 만큼의 진정성은 가지지 못했다. 골치 아프다.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 갈팡질팡하며, 분열되어가는 자아는 다수 이데올로기에서 탈주하려고 마음먹은 이 시대 청년들의 가장 평범한 자화상은 아닌가?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을 제거하는 것이 본질적인 방안이다. 소수의 투쟁이 다수 폭력에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일종의 반폭력의 정치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런 극단적 폭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으로 ‘시민다움의 정치’라는 전략을 꺼낸다. 소수에 대한 동일성의 폭력이 반복되는 상황을 막으려면, 소수가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동시에, 기존의 통치전략(피지배층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허점은 있다. 소수자 간의 연대와 동시에 개개인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 분리와 연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서 ‘소수자의 다수 되기’를 실천하자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거다. 소수자의 다수 되기가 실현되어서 폭력이 사라진 사회를 달성할 때까지, 고통받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포기하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할 것 아닌가? 또, 나는 그렇게 쓰러지지 않고 싸워나갈 맷집이 있는 인간인가?
결국, ‘소수자의 다수 되기’의 전제는, 투쟁하는 개인이 반폭력에 대한 정당성을 잊지 않으면서도, 폭력에 쉽게 쓰러지지 않는 맷집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체력을 바탕으로, 소수 의제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까지 나아가야 할 테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영혜처럼 죽을 용기가 없다면, 최소한 주변의 폭력적인 언사에도 무릎 꿇지 않을 정신적 체력을 길러야겠지. 마동석급 맷집을 가진 멘탈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