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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Nov 10. 2020

 우리는 모두 약점과 오류 투성이!

우리의 못난 점들을 서로 용서하자!

ㅡ 365 매일 읽는 긍정의한줄ㅡ

We are all full of weakness and errors;
let us mutually pardon each other our follies;
It is the first law of nature.

우리는 모두 약점과 오류 투성이므로 우리의 못난 점들을 서로 용서하자.
이것이 자연의 제1 법칙이다.
ㅡ볼테르 Voltaireㅡ


오늘의 긍정의 한 줄에서 만나보는 인물 볼테르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재밌는 작가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라는 이름은 프랑스아마리 아루에 (Francois-Marie Arouet)의 필명이지만 대중에게는 볼테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볼테르는 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다. 부친은 볼테르를 열 살에 예수회 학교에 입학시킨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볼테르는 두뇌만 명석 할 뿐 아니라 위트, 재치도 만점이다.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의 만남이 전환점이 되기도 하는 데, 내 느낌으로는 볼테르의 인생에서 첫 번째 운명적인 만남이 그를, 문학 살롱 '탕플(Temple)이라는 데로 데리고 간 대부가 아닐까 싶다.

당시 볼테르는 열 두살 이었다는데, 탕플은 당시에 '쾌락을 추구하고 무신론적인 귀족들이나 시인들이 모이는 요즘의 문학동호회' 쯤 되는 듯 하니... 볼테르는 똘망똘망한 애늙은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볼테르라는 필명이 탄생한 계기와 첫 번째 감옥스토리는 이렇다.

볼테르가 당시 루이15세의 섭정인 오를레앙 공작에 대해 풍자시를 썼다는 오인으로 인해 감옥에 투옥되었고, 투옥 중 비극 '오이디푸스'의 성공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프랑스아마리 아루에라는 이름 대신 볼테르라는 필명을 지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볼테르의 두 번째 감옥행 스토리다.

어느 날 귀족 로앙에게 덤벼 말다툼이 벌어지자 그의 하인들로 부터 몰매를 맞고 분이 풀리지 않아 한판 붙으러 갔다가... 감옥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국으로 망명을 가는 조건으로 감옥에서 풀려난다.




(365매일읽는긍정의한줄,린다피콘:책이있는풍경)



볼테르의 영국으로의 망명은 프랑스의 전제정치와 비교되는 영국 의회정치를 접하면서 프랑스 정치체제를 더 강하게 비판하는 계기가 된다. 프랑스로 귀국하게 된 볼테르는 프랑스를 비방하고 영국을 찬양하는 '철학서간'을 출간하고, 또 다시 밉상이 되어 책은 불태워졌고 작자 볼테르는 당시 그의 애인 (에밀리 뒤 샤틀레 후작부인)의 영지로 도망을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10여 년간 문학활동을 했다고 한다.


"만약 영국에 종교가 하나밖에 없다면, 그 독재는 무서운 것이 되리라. 만약에 두 개의 종교가 있다면, 그것들은 서로 목을 자르리라. 그러나 30개의 종교가 있으므로, 그것들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문학이 대접을 받고 있는 영국, 볼테르에게 영국은 마치 고기가 물 만난 느낌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귀족에게 덤볐다는 이유로,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귀족들조차 볼테르가 하인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에 동조 내지는 웃음거리로 즐기는 프랑스 귀족사회에 비해, 당시에 영국은 최소한 볼테르에게는 젠틀맨이었음이 분명하다.






볼테르의 애인스토리다. 그의 애인 에밀리 뒤 샤틀레 후작부인은 최초의 근대 여성 과학자, 수학자로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다고 한다. 역사상 뛰어난 수학자, 과학자인 그녀는 동시에 파티, 놀음, 혼외정사까지 성적으로 개방된 여성이었다니... 어쩌면 볼테르의 애인이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사실이 이해가 된다.

당시 볼테르는 지금으로 말하면 문학계의 BTS정도였을 듯 하니, 부인이 욕심을 낼 만도. . .

당시 귀족들은 정략결혼으로 사회적 지위를 굳히고, 정부를 두는 일은 일반적인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뭐랄까... 귀족이 애인도 없어? 뭐 이런 분위기!


부인의 여러 정부 중 볼테르가 가장 유명한 애인이라니, 이유인즉은 볼테르는 에밀리가 어렸을 때부터 에밀리 부친의 살롱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처음엔 우정에서 연인이 된 두 사람...

암튼 볼테르가 불태워진 문제의 책으로 인해 체포되지 않기 위해 도망을 간 곳은 바로 에밀리 남편의 성이었다.

참으로 요지경이다. 당시 귀족사회의 분위기라니 참... 남편의 묵인하에 오랜 시간 동반자가 됨은 물론, 남편의 성에서 '계몽주의 소울메이트'로 존재했다고 한다.

에휴 ㅠ 이냥반들 ㅋㅋㅋ



(프랑스 페르네볼테르전경)




볼테르는 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수년 간 지내다가 페르네라는 곳에 정착한다. 페르네는 스위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 볼테르는 150여 명 밖에 살지 않았던 페르네에 교회, 학교, 병원들을 짓고 그곳에서 20여 년 간 지낸다. 페르네는 후에 그의 비서에 의해 '페르네 볼테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볼테르는 페르네에서 다양한 문학활동을 활발히 하여 일명 '볼테르 시대'를 열었고, 진보파로 반카톨릭 교회 캠페인을 활발하게 벌임으로써 '페르네 장로'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수레바퀴 처형)



당시 유명했던 한 사건, 칼라스 사건은 카톨릭에대한 광신으로 인해, 부정 재판 탄핵한 사건으로 볼테르는 70세의 나이에 사비를 쓰면서 까지 칼라스를 적극 옹호한다.


"불관용은 신의 법도 아니다. 그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순교자가 될지언정 망나니가 되지 말라 관용정신이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 "







'칼라스 사건'의 전말이다.

1761년 어느 날 개신교인 청년의 자살을 놓고 카톨릭교도들이 칼라스와 그 가족들이, 아들의 개종을 막으려고 살해한 것이라고 소문을 낸다. 시 관료들은 칼라스에게 사형을 집행했다. 처형방법도 수레바퀴형이라니 참 잔인함이 극에 달한다. 칼라스의 처참한 죽음과, 죽어가면서 자신의 결백함을 하나님께 외치는 모습을 본 볼테르의 유명한 말이다.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


볼테르는 사건 이후 칼라스 가족을 변호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볼테르의 노력은 재심을 요구하는 여론으로 이어지고, 칼라스의 아들은 자살한 것으로, 판정이 번복되는 판결이 내려졌다. 칼라스의 죽음은 볼테르의 노력으로 처형된 지 3년 만에 무죄 선고가 난 것이다. 하늘에서라도 젊은 청년의 한이 풀렸을니 천만다행이다.


칼라스의 사건을 곱씹으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소문'


우르르 몰려다니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무책임하게 퍼뜨리는 사람들은 볼테르의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생각 없이 또는 악의로 내뱉은 말로 한 가장이 처참하게 죽어갔고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정말 그 눔의 주둥아리들은 어떻게야 정신을 차릴지...






두 번째 떠오른 단어는 ''

볼테르의 흥미로운 면중의 하나는 그의 놀라운 재력이다.

페르니 성을 구입한 작가!

황무지나 다름없는 마을을 일으킨 계몽가!

고리대금이 금지된 당대에 왕실에 거액을 빌려주고 종신 연금을 받은 큰손 철학가!

사망 즈음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20대 영주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하니, 게다가

당대 유럽에서 가장 부자인 평민이자 가장 유명세를 떨친 작가!

볼테르가 재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아니 빚만 남긴 가난한 작가였다면, 칼라스의 재심은 글쎄...

볼테르의 능력은 물론, 진실과 정의를 향한 열정이 감동적이다.


그리고. . .


최소한 오늘 만난 볼테르에 대한 느낌으로...

그의 말을 깊이 생각해보련다.


신앞에 인간은 모두 똑같은 약점과 오류 투성이 일 뿐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겠지.

잘난 점들은 서로 칭찬해주고,

못난 점들은 서로 용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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