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금씨책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태섭 Mar 13. 2018

올해의 책 - <냇 터너의 자백>

'책보다 더 재미있다' 금태섭의 <금씨책방> 5 - 냇 터너의 자백

올해는 이것저것 일이 많은 와중에도 의외로 꽤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책을 꼽으라면 윌리엄 스타이런<냇 터너의 자백(The Confessions of Nat Turner)>이 아닐까 싶다.


미국 남부에서 노예제도는 체계적이고 전면적으로 유지되어서 이미 자연스러운 사회 구조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노예들이 처한 상황이 극히 참혹하고 그 기간이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적인 반란이나 봉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사회전체가 감시자의 역할을 해서 반항의 움직임은 초기에 제압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들의 교육수준이 워낙 낮고 처지가 어려워서 조직적인 저항을 도모하기가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 같다. 가끔씩 노예 개인의 도주 사건이 있었을 뿐.

1831년 버지니아에서 냇 터너라는 이름의 노예가 몇몇 동료들과 함께 일으켰던 소요 사태가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 이들은 며칠 사이에 55명의 백인을 살해했다. 규모나 형태가 ‘무장봉기’나 ‘반란’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는 전혀 아니고, 농장을 습격해서 여자, 아이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이는 ‘학살’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불과 2-3일 만에 진압되었고 주모자인 냇 터너는 두 달간 숨어 지내다가 체포된다. 그와 추종자 17명은 교수형을 당했다. 나머지 무리들은 (죽이면 아까운 재산이니까) 다시 주인에게 돌려줬다.

냇 터너는 체포된 이후 지금으로 치면 검사 역할을 하는 지방 관리에게 자신의 성장과정과 범행 경위 등을 털어 놓는다. 7,000 단어로 이루어진 이 짧은 자백을 토대로 “소피의 선택”의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이 쓴 소설이 “냇 터너의 자백”이다.

이 소설의 미덕은, 현실을 작가의 생각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고 한 점에 있다.

냇 터너는 극히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노예였다. (소설을 읽어보면 그 당시에는 백인들도 문맹률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그의 두 번째 주인은 책에 호기심을 보이는 냇 터너에게 글을 가르쳤고 성경 공부를 시켰다.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책인 성경을 수도 없이 반복해 읽은 냇은 상당한 분량을 암송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때로는 백인 손님들 앞에서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이상주의적 성향이 있는 주인은 그에게 자유를 약속한다. 몇 년간 착실하게 지내면 기술을 가르치고 해방을 시켜주겠다고 한 것. 날 때부터 노예로만 살았던 냇 터너는 주인을 떠나야 한다는 말에 처음에는 겁을 내고 저항했지만, 이내 자유의 꿈을 꾸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진 주인은 약속을 어기고 냇을 팔아넘겼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배신감에 떨며 모든 백인을 죽여 버리겠다는 결심을 한다. 다른 모든 것보다도 그 주인의 동정심에 대해서 참을 수 없어 한다.

아예 가능성이 없었다면 모를까 한번 자유의 꿈을 꾸다 좌절하게 된 냇 터너는 심한 고통을 느끼고 정신적으로도 문제를 겪게 된다. 성경을 독자적으로 해석하면서 신이 자신에게 어떤 과업을 주었다고 상상하게 되고 결국 추종자들을 모아 백인을 학살하기 위해 나선다.

노예 제도 하에서 흑인이 백인들에게 저항한 사건을 그린 이 소설은, 그러나 출간 후에 흑인 작가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에 맞닥뜨리게 된다. 주인공인 냇 터너의 모습이 흑인 작가들이 머릿속에 상상해왔던, 그래야만 하는, 흑인 노예 ‘영웅’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냇 터너는 거의 정신이상에 가까울 정도로 광신도의 행태를 보인다. 스스로를 선지자로 여기고 자주 단식을 하며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주기도 한다. 백인을 학살한 동기 자체가 종교적인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또한 소설 속에서 그는 주인의 딸인 백인 여성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의 연장선상에서 그 여자를 칼로 찔러 죽인다. 흑인 작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윌리엄 스타이런의 냇 터너 : 10명의 흑인 작가가 대답하다>라는 책까지 출판될 정도였고, 이 책의 저자들은 <냇 터너의 자백>을 읽을 가치가 없는 인종주의적인 책으로 비판한다.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저자인 윌리엄 스타이런은 소설 뒷부분에 <Nat Turner Revisited>라는 제목으로 심지어 게오르그 루카치의 “역사소설론”까지 동원한 장문의 해명(?)을 써놓았다.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을 잠시 치워놓고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매우 뛰어나다. 스타이런은 미국의 노예제도가 너무나 강력하고 완벽하게 통제되어서 집단적, 조직적인 저항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냇 터너는 반란을 꿈꿨고 추종자들을 모았는지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여기에서 스타이런은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펴면서 사건의 원인과 경과를 손에 잡힐 듯이 보여준다. 냇 터너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정신이상에 가까운 광신도였고, 그 종교적인 확신으로 추종자들을 모았던 것이다.

백인 여성과의 로맨스, 그리고 그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살해 행위도 그렇다. 7,000단어로 이루어진 실제 냇 터너의 자백은 냇의 성장 과정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55명의 백인이 살해되는데 우두머리인 냇 터너는 막상 학살의 시간이 오자 겁에 질려 칼도 한번 휘둘러보지 못 한다. (이런 행동으로 인해서 지휘자로서의 위치가 흔들리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같은 마을에 살던, 그 동네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던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것이다.

작가는 냇 터너의 자백에서 여성 이야기가 없고 그가 독실한 신자라는 점에서 냇이 독신이었다고 추측하고, 그가 유일하게 살해한 여성과의 관계에서 그의 감정을 추론해낸 것이다.

실제로 냇 터너 사건이 일어났던 버지니아 출신인 작가의 묘사에 따르면 당시 노예인 흑인들은 글을 못 읽는 정도가 아니라 말도 분명하게 못 하는 수준의, 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동료들을 보면서, 역시 비슷한 수준의 냇 터너가 ‘흑인과 백인은 평등하며 흑인도 백인 못지않게 훌륭하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거의 모든 흑인들과 다르게 글을 읽을 줄 아는 자신은 백인이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교양있고 깨끗하고 친절한 백인여성에게 끌리는 일이 없었을까. 또한 그랬다고 해서 그가 백인 우위의 문화에 젖어 타락했다거나 혹은 흑인의 배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 백인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냇 터너가 백인 여성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판단은 책을 읽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이 추론한 사실을 그대로 쓴다고 해서 작가가 그 사실을 옹호하는 사람(즉 인종주의자)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타이런이 인용한 ‘역사가’들 중에는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수많은 집단적인 반란이 일어났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용감한 흑인 혁명가들’의 이야기를 지어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절망적인 세계를 그린 작가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

읽었다고는 하지만, 1831년에 있었던 사건을 1966년에 쓴 책이라서 영어가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도 꽤 있다. 특히 흑인들의 구어체를 그대로 옮긴 부분은 한참 들여다봐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 곳이 많다. “Mastah”나 “Marse Samuel”이 “주인님” 혹은 “사무엘 주인님”인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gin’ral”이 “general”이라거나 “Nem’mine”이 “Never Mind”라는 것을 알아보려면 몇 번이나 봐야 한다. 맛을 살리는 번역은 불가능한 책. 진한 미국 남부 사투리를 맛보고 싶은 분들(만약 있다면ㅋ)에게 권한다.

아래는 냇의 무리 중 2인자이자 마지막까지 냇에게 충실했던 하크가 교수대로 끌려가면서 냇에게 하는 말. 그들이 살던 세상에 대한 환멸과 냉소가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당시 흑인들에게 세계는 이런 것이었다는 것 아닐까 싶다.

“Dis yere some way to go,” I hear Hark say. “Good-bye, ole Nat!” he calls.
“Good-bye, Hark,” I whisper, “good-bye, good-bye.”
“Hit g'wine be all right, Nat,” he cries out to me, the voice fading. “Ev’ythin’ g'wine be all right! Dis yere ain’t nothin’, Nat, nothin’ atall! Good-bye, ole Nat, good-bye!”
Good-bye, Hark, good-bye.



매거진의 이전글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