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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태섭 Jul 02. 2018

밀린 서평, 영화평, 드라마평

'책보다 더 재미있다' 금태섭의 <금씨책방> 16 - 먼 북으로 가는 길

- "먼 북으로 가는 길" (리처드 플래니건 지음, 김승욱 옮김, 문학동네)



매우매우 잘 쓴 책.


주인공인 도리고 에번스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일본군 포로로 잡힌다. 일본군은 9천명의 오스트레일리아 군인 포로 등을 동원해서 시암-버마를 잇는 철로를 건설하기로 한다. 지옥같은 강제노역으로 차례차례 죽어가는 동료 포로들의 사연과 주인공의 과거, 그리고 전쟁 이후의 삶이 교차되면서 읽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흔든다.


개인적으로는, 딱 내 취향에 맞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더욱 느낌이 오래 남았다. 두 개의(혹은 세 개의?) 분절된 삶, 거짓말, 우연, 기억, 복수.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우리가 잘 알면서도 딱 집어서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일본 사람들의 특징을 정확하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시 일본군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인 병사의 독특한 위치를 잡아낸 점.


부산 출신의 조선인 병사 최상민은, 매달 50엔을 준다는 약속을 받고 일본군에 입대했지만 조선인이기 때문에 끝내 정식 군인이 되지 못한다. 훈련소에서 조선인들끼리 서로 뺨을 때리게 하는 식의 훈련을 받던 그는 철도 건설 현장에서도 포로를 구타하는 일을 한다. 조금이라도 사정을 봐주다가는 일본인 장교에게 자신이 폭행을 당하는 위치. 전쟁이 끝나고 일본군 장교들은 석방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와 같은 조선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전범재판을 받고 교수대로 끌려간다. 마지막에 교수대에 선 그의 생각은 이렇다. "위대한 조선이라니 무슨 소리야? 내 50엔은 어디 있어? 난 조선인이 아니야. 난 일본인도 아니야. 난 식민지 백성이야. 내 50엔은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푹 빠져서 읽을 수 있는 책인데, 다만 뒷부분에 우연이 지나치게 개입된 설정을 빼고, 남여 주인공들이 스치듯 만나는 장면(닥터 지바고가 연상된다) 등등을 빼서 한 50페이지 정도 줄이면 완벽한 소설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쨌든 올해의 소설 후보 중 하나. 소설 속에 절묘하게 섞어 넣은 하이쿠도 매우 와닿는다.


"하기야 현실이 언제 현실주의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적이 있던가?" 


"오로지 달

그리고 나만이 추위에 식어간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다리에서."



- "3층 서기실의 암호" (태영호 지음, 기파랑)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를 지내다가 2016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태영호의 자전적인 책. 떠나온 북한의 체제를 일방적으로 비판하지도, 그렇다고 턱도 없는 일들을 변호해주려고도 하지 않고 매우 균형감 있게 잘 써놓았다.


얼마 전에 "선을 넘어 생각한다.(박한식, 강국진 지음, 부키)"를 읽고 크게 실망했는데,(북한 체계에 대한 변호가 예전에 '내재적 접근법' 운운하던 황당한 사람들을 연상하게 한다) 이 책은 상당히 객관적이다.


남북관계에 대한 나름의 해법 제시 같은 것보다도 작가가 직접 겪은 경험이나 무심결에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으로 알고 쓴 설명들이 인상적이다. 수도 없이 등장하는 처형 얘기와 평양에서 지방으로 보내는 것 자체가 처벌이 되는 나라가 북한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아이, 토냐(그레이스 길레스피 감독, 마고 로비 등 출연)"



후배들이 당연히 토냐 하딩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톤 오노가 욕을 먹던 거 기억나지? 그거보다 더 욕을 먹던 사람이야."라고 설명해줬는데, 요즘 후배들은 안톤 오노도 모른다는 게 함정.


찌질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찌질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면서 최고의 피겨 스케이터로 인정받고 싶어했던 주인공이 한 순간에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욕을 먹는 악녀로 추락하는 이야기.


그런 역정 중에 단 한번의 가장 빛나는 순간, 공식 시합에서 최초로 트리플 액셀을 성공시킨 순간의 표정이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을 다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진지하기만 한 영화 같은데, 웃기는 대목도 매우 많다. 굳이 분류하자면 블랙코메디)


별 5개. "영화로 취향을 드러내자"를 하기 전에 봤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을 것이 분명한 영화.  



- "디 아메리칸즈 시즌 6(캐리 러셀, 매튜 리즈 출연)"


최고의 드라마가 보여주는 최고의 피날레. the Wire나 West wing을 가장 좋아하지만, 이처럼 말을 잊게 만드는 결말은 아니었다. 강추.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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