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씨에 적응하는 건 왜 어려울까
그때 갑자기 대각선 안 보이는 곳에서 누군가 크게 외쳤다. "여기 119 좀 불러주세요!!"
-본문 중에서
어느덧 가을이 왔다. 아직 좀 덥긴 하지만 어쨌든 10월은 가을이다. (기상청에서 9월도 여름으로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다.) 가을이 오면 보통 온 동네에 나무들이 염색을 하고 다닌다.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으로 꾸며지는 단풍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참 좋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10월 말이 되면 염색을 시작할 거다. 그리고 따뜻했던 날씨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추워질 거다.
단풍 예습도 할 겸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작년 사진을 찾아봤다. 그리고 그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작년 이맘때쯤 단풍으로 유명한 경기도 광주 ‘화담숲’에 갔었다. 화담숲은 그냥 갈 수는 없고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예약이 풀렸다고 해서 들어가 보니 접속 대기 인원이 4천 명이나 있었다. 그때 나는 2시간이나 기다려서 예약을 했었다.
올해 역시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아래에 있는 사진처럼 화담숲은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모노레일을 타면 화담숲 전체를 볼 수 있다. 단풍들 뿐만 아니라 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작은 다람쥐와 새소리도 너무 듣기 좋다. 시각과 청각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으니 사람들이 많은 게 당연했다. 어릴 적에는 이런 곳에 소풍 오면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지금은 누구보다 즐기고 있는 걸 보니 나도 나이가 들긴 했나 보다.
모노레일 하차장 앞에는 사람이 탈 수 있는 여러 동상들이 있다. 거기서 외국인 아이를 만났다. 아주 작고 예쁜 귀염둥이었다. 너무 작아서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까지 왔는데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봐야지!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아이 엄마에게 물어봤다.
"Can i ride with your child?" (아이랑 같이 타봐도 될까요?)
"sure. why not" (그럼요. 안될 거 없죠)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번쩍 안아서 호랑이 위로 함께 올라갔다.
"Korea tiger very strong. Let go!" (이게 바로 대한민국 호랑이의 위대함이란다! 소리 질러!)
미래의 주역이 될 아이에게 호랑이의 용감함을 심어줬다. 너무 뿌듯했던 걸로 기억한다. 한 바탕 즐겁게 놀고 나니 슬슬 배가 고팠다. 비교적 가까운 경기도 이천에 후배 누나가 하는 한정식 집이 있었다. 이천 쌀맛이 그렇게 좋다고 귀가 따갑게 들어서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밥맛이 뭐 다 그렇지 뭐. 요즘은 햇반도 찰기가 탱글탱글하게 잘 나오는데 이천이라고 뭐 다르겠어?'
한정식 집에 도착했는데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여기 사람들은 365일 한정식만 먹고사나? 주차를 마치고 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분명 간장게장 정식만 시켰다. 그런데 이게 뭐지? 반찬이 엄청 많이 나왔다. 게다가 모든 게 너무 맛있었다. 특히 저 돌솥밥은 진짜 미쳤다. 왜 임금님이 이천 쌀만 먹었는지 알겠다. 햇반도 맛있지만 그거랑은 차원이 달랐다. 쌀의 윤기, 쌀의 탱탱함, 쌀의 쫄깃함이 예술이었다. 특히 쌀의 익힘 정도가 굉장히 좋았다.
"여기 사장님~이천 돌솥밥 하나 더 주세요~"
돌솥밥이 나오고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게 이번에는 더 맛있어 보였다. 그때 갑자기 대각선 안 보이는 곳에서 누군가 크게 외쳤다. "여기 119 좀 불러주세요!!"
당장 수저를 내려두고 그쪽으로 여자친구랑 같이 갔다. 반대편으로 가보니 70대쯤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누워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더 생각할 시간도 없이 몸이 자동으로 뛰어갔다.
"저 응급실 간호사인데요. 잠깐 심폐소생술 멈춰주세요."
나는 위에 있던 분에게 잠깐 멈추라고 말하고 아래에 있던 여성분의 목에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댔다. 동시에 여자친구(중환자실 간호사다)는 양측 눈꺼풀을 위로 뒤집어 휴대폰 불빛으로 여성분의 동공상태를 확인했다.
"오빠. 퓨필 프롬프트해.(동공 반응 정상)"
뇌로 가는 혈류가 당장은 막히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목에 대고 있던 내 손가락으로도 두근두근 거리는 박동이 느껴졌다. 다행히 맥박도 있다. 방금 전까지 심폐소생술을 하던 분이 나에게 물었다.
"아니. 심폐소생술 안 해도 돼요? 의식이 없잖아요!"
"아 의식은 없어도 다행히 맥박이랑 동공반사는 있어서요. 심폐소생술은 안 해도 됩니다. 혹시 떡 같은 걸 먹었나요?"
"아니요. 떡 먹은 건 없고. 갑자기 가슴을 잡더니 옆으로 쓰러졌어요. 의식이 없어서 심폐소생술부터 했어요. 갑자기 왜 그런 거예요?"
"매년 이맘때쯤 심근경색 발생 할 가능성이 많기는 해요. 자세한 건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 혹시 119 신고하신 분 계신가요?"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네 여기 지금 통화 중이에요"
바로 옆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119 대원이랑 통화 중이라며 나에게 휴대폰을 넘겨줬다.
"여보세요? 네 같이 식당에서 밥 먹고 있던 간호사인데요. 환자분 보니까 펄스(맥박)도 있고, 퓨필(동공)도 프롬프트 해서 다른 분이 심폐소생술 하던 건 일단 멈췄어요. 의식은 없어도 숨도 잘 쉬고 있고요."
"목에 뭐가 걸린 건가요?"
119 대원이 전화로 물어왔다.
"아니요. 목에 걸린 건 없고 갑자기 가슴을 잡고 옆으로 쓰러졌대요. 얼마나 남으셨어요? "
"네 이제 5분 정도 남았습니다."
"네 일단 환자 분 의식 깨워보고 있을게요."
그렇게 119 대원과 전화를 끊고 누워있는 여성을 봤다. 맥박과 숨은 쉬고 있었지만 약했다. 아무래도 의식이 완전히 깨지 않아 그런 것 같았다. 일단 119 대원이 오기 전에 여성분을 좀 깨워보기로 했다.
병원에서 환자 의식이 잘 깨지 않으면 하는 방법 중 하나인데, 검지와 중지를 합친 손가락으로 쇄골을 강하게 누르는 것이다. 지금 한 번 쇄골에다가 해보면 느낄 거다.(본인에게 강하게 하면 아파요) 이거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게 두세 번 하다 보니 여성분의 의식이 돌아왔다.
"아.. 아아 파 왜 애 그래.." 가만히 누워만 있던 여성분이 눈을 뜨고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환자분 정신 좀 드세요? 눈 뜨고 계세요. 괜찮아요. 이제 곧 119 올 거예요. 눈 뜨고 숨 크게 쉬세요" 의식이 완전히 명료하지는 않지만 조금 돌아왔다. 여성분이 숨을 잘 쉴 수 있도록 앉은 자세를 취했다. 그때 마침 119 대원이 들것을 가지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대원들에게 방금 전 있었던 상황들에 대해서 한 번 더 인계했다. 대원 중 한 명이 여성에게 산소포화도와 혈압을 측정하더니 괜찮다고 말했다. 간단한 측정이 끝나고 119 들것에 실려서 식당을 빠져나갔다.
"아이고. 덕분에 진짜 다행이에요. 저기 너무 고마워서 번호라도"
일행분이 나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물어왔다.
"아니에요. 얼른 병원으로 가야 할 텐데 지금 바로 따라나가세요! 검사 잘하시고, 치료도 잘 받으세요!"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119와 그 여성이 떠나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여자친구랑 원래 식사하던 자리로 돌아가는데 주변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고생했다며 박수를 쳐줬다.
"아이고 정말 고생 많았어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다 식은 돌솥밥이 보였다. 서로 멍한 표정으로 대화도 없이 수저를 들었다.
"민지야.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순식간에 뭐가 지나간 거 같아"
서로를 바라보면서 밥을 먹다가 입맛이 다 사라진 걸 느꼈다. 당연한 일을 한 건데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수저를 내려놓고 나왔다. 그리고 카운터에 가서 계산서를 내밀었다. 사장님이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영웅이 선배라면서요. 덕분에 큰일 막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고마운데 내가 해줄 건 없고 오늘은 그냥 가요."
첫인상은 웃음기도 없고 정말 무뚝뚝해 보이셨는데 반전 매력이었다. 식당을 나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여자친구랑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일은 뉴스에서만 봤는데 우리한테도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가장 다행인 건 누워있던 여성분이 괜찮아진 상태를 봤다는 거다.
작년에 있었던 이 일은 간호사를 하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 올해도 10월 말이 되면 화담숲으로 단풍여행을 가고 싶다. 갔다가 이천에 있는 임금님 밥 먹으러 또 한 번 가야겠다. 그럼 뿌듯했던 그때의 감정이 다시 한번 느껴질 것 같다.
* 보통 10월 말쯤이 되면 날씨가 갑작스럽게 추워진다. 고령이거나 뇌, 심장에 기저질환이 있는 분은 이때가 위험하다. 왜냐하면 추운 날씨로 적응을 못한 혈관들이 쉽게 수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약간 막혀있던 혈관이 수축까지 해버리면 피가 통하지 않게 된다. 실제로 10~11월 응급실에는 뇌경색, 급성심근경색 환자들이 평소보다 자주 온다. 곧 다가올 겨울에는 모두 건강 조심하시고 안전하게 단풍여행을 다녀오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