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유럽을 떠올릴 때 마치 중세 시대를 향해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거리를 상상한다. 품위 넘치는 옷을 입은 마부들이 이끄는 마차 행렬이 나타나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거리를 달린다면 유럽을 떠올리는 당신의 로망을 더욱 배가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로테르담에서는 고정관념 속에 자리한 유럽의 로망은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
멀리 동쪽에서 날아온 이방인으로서 로테르담은 그 로망을 철저히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일단 비딱한 세모 형태를 가진 로테르담 중앙역 외관을 마주한 순간부터 정녕 유럽 도시인지 하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 로테르담 중앙역의 기이했던 그 모습은, 로테르담의 다른 랜드마크에 비한다면 굉장히 얌전한 편이다. 왠지 모르게 묘한 돛을 올리고 있는 에라스무스 다리도 그러하다. 전체적인 도시 분위기가 우리에게 친숙한 앤틱한 그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건축에 대해선 문외한이나, 멋들어지면서도 기이하게 생긴 건물을 바라보며 최첨단 건축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로테르담이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로테르담은 여느 유럽 도시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정말 쑥대밭이 됐다.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독일 공군이 1940년 5월 14일 로테르담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나치 독일 공군의 폭격을 맞은 로테르담 @풋볼 보헤미안
약 80여 대의 폭격기가 쏟아낸 폭탄은 무고한 민간인 884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도심지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당시 남은 사진을 보면 상황이 심각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지금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성 로렌스 교회를 제외한 도심지 내 모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이 공습 한 번에 네덜란드가 백기를 들었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전개된 공습이었다.때문에 지금 로테르담에는 여타 유럽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도시를 연고로 한 페예노르트 역시 나치 독일 공군의 역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걸 소개하기 위해서다.
1935-1936시즌 에레디비시에 정상에 오르면서 네덜란드 신흥 강호로서 우뚝 서게 된 페예노르트는 1937년 네덜란드에서 가장 현대적이면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안방까지 가지게 됐다. 로테르담 남부 페예노르트 거리에 자리한 드 쿠이프다.
1930년 클럽의 회장직을 맡은 렌 판 잔트빌레는 최신식 스타디움 건설을 통해 명문 클럽 초석을 다질 계획을 세웠다. 당시 축구 경기장은 지붕이 없는 스탠드로 이뤄진 구조로 이루어진 곳들이 상당히 많았다. 우리네 다소 연식이 오래 된 공설운동장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겠다. 물론 지붕이 있는 경기장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지붕이 있는 경기장은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경기장 곳곳에 솟은 기둥 때문에 팬들이 관전하는 데 심각하게 방해를 받아야만 한다는 점이다. 기둥 때문에 관전하기 힘든 경기장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런던을 연고로 한 풀럼의 크레이븐 코티지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기장이라 고풍스럽다는 평가도 받지만, 관전 여건은 여전히 그리 좋지 못한 경기장이다.
어쨌든 판 잔트빌레 회장은 단순히 큰 규모가 아니라, 이런 난점까지 극복할 수 있는 스타디움을 원했다. 이때 그의 마음을 쏙 빼앗은 경기장이 있다. 과거 아스널의 홈이었던 하이버리와 미국 메이저리그 명문 팀 뉴욕 양키스의 안방 양키 스타디움이다. 이 두 경기장은 종목은 달라도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관중석을 2층 구조로 쌓아 올린 ‘더블 데크’ 스타디움이었다는 것이다.
천장에 큰 지붕을 만들어 최대한 사람들이 비를 피하게끔 하고, 기둥도 없어 어떠한 방해 없이 경기를 즐길 수 있었다. 이층 구조이니 관중 수용 규모도 원하는 만큼은 늘릴 수 있었다. 지금이야 이런 구조의 스타디움이 전 세계에 널려 있어 식상한 느낌을 줄 수 있으나, 그때는 사람들의 통념을 깨는 최첨단 경기장이었다.
페예노르트 홈구장인 드 쿠이프의 외관 @풋볼 보헤미안
판 잔트빌레 회장은 바로 이런 경기장을 만들길 원했다. 판 잔트빌레 회장은 전체적인 그림을 잡은 후 새 경기장 건설을 위한 협력자를 구하기 위해 발로 뛰어다녔다. 독일과 영국 사이에서 석탄 중계 무역을 하며 엄청난 부를 쌓았던 억만장자 다니엘 판 버닝겐을 파트너로 끌어들여 건립을 위한 예산을 마련한 후, 당시 네덜란드를 대표하던 건축가인 렌데르트 판 데르 플루그트에게 설계를 의뢰해 각고의 노력 끝에 1937년 3월 원하던 스타디움을 세상에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그 경기장이 바로 지금의 드 쿠이프다.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의 정점을 달리고 있던 이 드 쿠이프가 나치 독일의 무자비한 공습으로 고철이 되고 말았다. 나치 독일 공군이 폭격한 때가 1940년 5월의 일이니, 개장한 지 3년 만에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 전쟁 기간 내내 고통을 받아야 했다. 나치 독일군은 전쟁 수행 물자를 얻는다는 명목으로 드 쿠이프의 철골 구조물을 뜯어가 무기 제작에 썼다. 세계 최고의 구장을 만들어 페예노르트를 명문 클럽으로 우뚝 세우겠다며 드 쿠이프의 산파 구실을 했던 판 잔트빌레 회장으로서는 비통함에 가슴이 무척 아팠을 터다.
그 인고를 겪고도 드 쿠이프는 살아남았다. 전후 부지런히 재건해 다시 드 쿠이프의 간판을 내걸었다. 이후 판 잔트빌레 회장이 꿈꿨던 네덜란드 최고 구장으로서 명성을 누렸다. 페예노르트가 네덜란드 3대 명문으로 기틀을 잡은 건 당연하고,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에는 암스테르담 올림픽주경기장과 더불어 ‘오렌지 군단’의 근거지로 쓰였다.
축구 역사가 쓰이기도 했다. 네덜란드가 벨기에와 더불어 개최한 유로 2000에서 총 다섯 경기가 치렀으며, 그중에는 다비 트레제게의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프랑스가 정상에 올랐던 결승전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이 방문하자 무척 놀랐던 페예노르트 가이드. 정말 친절했다. @풋볼 보헤미안
드 쿠이프에서는 유로 2000 결승전이 열렸다. 그리고 수십년째 '오렌지 군단'의 안방으로 쓰였다. @풋볼 보헤미안
2019년 기준으로 개장 82주년을 맞은 드 쿠이프에는 이러한 역사의 흔적이 가득하다. 여타 빅 클럽들의 홈 경기장을 방문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세련된 맛은 없다. 특히 ‘앙숙’이자 ‘라이벌’인 아약스의 홈인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와 비교하면 확실히 낡긴 낡았다.
그런데 그 ‘낡음’ 속에 재미가 가득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현재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터널이다. 드 쿠이프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경기, 드 쿠이프에서 터진 골, 드 쿠이프에서 국가대표가 된 선수 등등이 마치 벽화처럼 새겨져 있다. 반대편 스탠드에는 20년 전 선수들이 쓰던 터널도 존재한다. 그곳에는 국적 불문하고 드 쿠이프의 푸른 잔디를 누볐던 적이 있는 세계적 선수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시설이 좀 낡았을지라도, 80년이 넘은 그 역사 덕분에 곳곳에 드 쿠이프와 관련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경기장 구석구석 소개해주던 페예노르트 관계자가 끊임없이 ‘썰’을 풀어내며 흥을 돋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성 세인트 교회를 제외하면, 어쩌면 로테르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일 수 있는 드 쿠이프는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매력적인 스타디움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매력이 가득한 드 쿠이프에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로테르담과 페예노르트는 1억 3,500만 유로(한화 1,721억 원)를 들여 ‘뉴 드 쿠이프’를 건립할 계획을 수립했다. 최근 십수 년간 이런저런 이유로 새 경기장 건설 계획이 실행 단계로 들어가지 못했었는데, 최근 점점 가시화 단계에 이르더니 2022-2023시즌 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로테르담 곳곳에 자리한 기상천외하면서도 놀라운 건물의 형태를 감안할 때, 새로 태어날 뉴 드 쿠이프 역시 최첨단 건축의 정수를 보여줄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올드 드 쿠이프’가 역사 속으로 퇴장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아쉽다. 건물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그 건물을 진정 빛나게 하는 건 눈에 보이는 외관이 아닌 보이지 않는 히스토리라 생각한다. 그래선지 네덜란드 대표 명품 구장 드 쿠이프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